삼십여년 전, 돈 문제로 힘들어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쩨쩨하게스리 공치사로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저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며 ‘갚을 필요없다’고 호기를 부렸었기 때문입니다. 몇달후 그가 돈을 갚겠다고 했을때에도 ‘술이나 한잔 사라’라고 한번 더 호기를 부렸었습니다. 전형적인 마초 컴플렉스였습니다. 제딴엔 ‘폼나게’ 질렀으니 제가 이걸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폼나려면 이것조차를 잊어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이십여년 후 그와 우연히 인연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만날때마다 옛날 얘기를 많이 했는데 어느날 제 마음속에서 찌질함이 꿈틀댔습니다. 그가 예전 제 도움을 한번은 언급하며 고마웠었다고 할법도 한데, 단 한번도 그 얘길 안하는 겁니다. 그래서 슬쩍 옛날 그 일의 언저리를 맴돌며 힌트를 줬습니다. 근데 그래도 그는 아무 말을 안합니다. 따식이 완전히 잊어버린겁니다.
그때 돈 갚겠다고 했을때 차라리 돈을 받을걸 그랬나.. 쩨쩨함이 점입가경입니다. 애당초 돌려받을 생각자체를 안했던 거긴 했지만 도움 받은 상대가 그 사실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다니 왠지 서운 괘씸.. 마음이 쩨쩨하게 흐르는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 무렵 한 중의 얘길 듣고 쩨쩨함을 헛웃음으로 감췄습니다.
절을 지으면서 자금문제로 어려워하는 중에게 돈 많은 신도가 돈을 빌려줬답니다. 시주를 한게 아니라 빌려줬다니 이 신도도 좀 쩨쩨합니다. 몇년 후 절이 크게 번창했는데도 중은 도통 돈 갚을 생각을 안하더랍니다. 그래서 신도가 중에게 물었습니다. ‘돈 안 갚냐?’ 중이 대답합니다. ‘갚았잖아’ 황당한 신도가 되묻습니다. ‘언제? 난 받은 적 없는데’ 그러자 중이 이랬답니다. ‘꼭 너한테 갚아야 하냐? 다른 사람에게 갚았다’ 그제서야 신도가 무릎을 치며 깨닫고 머리를 숙였답니다.
신도의 돈을 떼어먹은 중이 말장난을 하는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신도는 그 일로 뭔가 깨달았다니 좋은 얘기일 겁니다. 근데 뭘 깨달았다는 걸까요? 다신 누구에게 돈 안빌려준다.. 중도 믿지마라.. 돌고 도는게 돈이다.. 공수래공수거.. 나눔과 베품, 사랑과 평화..?
며칠 전,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던 분이 전화를 해서 ‘드디어 기반을 잡은 거 같다’며 기뻐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해줬습니다. 천성이 진실하고 착한 분입니다. 곧 사람들에게 빌린 돈도 갚을 수 있을 거 같답니다. 누구에게 얼마, 누구에게 얼마.. 근데 제 이름이 안 나옵니다. ‘어? 이 양반이?’
이걸 또 쩨쩨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그분의 상황도 급박했었지만, 공교롭게도 저도 일을 새로 오픈한 상태라 경제적 여유가 거의 없었고, 그래서 돈 빌려주는 문제로 아내와 큰 이견을 보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빌려줬던건데 그걸 잊어먹어? 쩨쩨함이 다시 꿈틀댑니다. 그래서 돈 빌려주던 무렵 언저리에서 힌트를 줬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모릅니다. 잊어먹은 겁니다. 그리 적은 액수도 아닌데 띠바 ㅋ
찌질하게 마음이 흐르려고 하는 저를 급히 타일렀습니다.
꼭 너한테 갚아야 하냐? 다른 사람에게 갚아도 되잖아.
십몇년전 중의 얘길 들었을때엔 사실 온전히 알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다시한번 새겨보니 세상이 진짜 그랬더군요. 도움을 주고받는 상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그러다 누군가가 절 도와주고.. 이렇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걸 까맣게 잊고 있는지도 모르는거구요. 지난번엔 그냥 한귀로 흘려보냈었던 중 얘기가 이번엔 진짜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