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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아버지와 함께 했던 마지막 나들이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아가기로 한 날.

그날 아침  아버지는 소풍가는 아이처럼 부산하셨다고 한다. 내가 도착하기 한시간 전부터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날 기다리고 계셨었단다. 아무리 평일이지만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중간에 길이 막힐 수도 있고, 또 저녁때 늦어지면 돌아오는 길이 막힐 수도 있을 것 같아 바로 출발했다.

'날씨 정말 좋네요'
정말 날씨가 좋았었다. 5월이었지만 햇살이 제법 따가워져서 차창을 조금 열고 달려도 될만큼 날씨가 상쾌했다.

'얼마만에 가시는 거예요?' 
'떠나고 처음이다'
'처음이요? 언제 거길 떠나셨는데요?'
'한 육십년 됐나..'
'아니 어떻게 육십년동안 한번도 안가보셨대요?'
'그러게 말이다. 허허'

가지고 있는 정보는 육십년전에 사용하던 옛날의 주소뿐. 충남 홍성군.. 문제는 예전의 그 지명이 과연 그대로 있는지였다. 육십년이 흘렀다면 분명히 바뀌었을 것도 같은데.. 일단 홍성군에 들어선 후 길가의 한 복덕방에 들러 주소를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주소는 지금 없단다. 어디쯤일까요.. 글쎄 모르겠는데.. 이리저리 들고 나기를 수십차례, 사람들이 조각조각 알려준대로 길을 찾아 어느 마을 근처에 다달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아버지의 오래전 기억속 그곳과 우리가 다다른 곳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아버지 기억속에 흔적을 잡을수 있는 단서라고는 단 두가지였다.
'악굴' 이라는 마을이름, 그리고 집앞에 있었다는 큰 '느티나무'

우선 악굴이란 곳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을 잡고 물어도 '악굴'이라는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길 한참.. '아니 젊은 양반이 '악굴'을 어찌 안데유?' 그 마을을 기억하는 노인을 드디어 만났다. 아버지가 차창으로 바짝 다가 앉으신다. 혹시 아는 얼굴일까 싶으셨나보다. 여긴'뒷골'이고 '악굴'은 저 산 옆으로 돌아 가야혀..' 여긴 뒷골이고 저쪽이 악굴? 그랬다. 악굴이 아니라 '앞골'이었던 거다. '에이 아버지, 악굴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랐죠. 악굴이 아니라 앞골이잖아요'

산 옆으로 돌아나가자 자그마한 개울너머에 마을이 하나 보였다. 어 근데.. 거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는게 아닌가. '아버지 잘 보세요. 혹시 저 느티나문가' 나무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저 나무 맞는 거 같다'

가까이 갔다. 맞단다. 그 마을이 아버지 어릴적 살던 마을이 맞단다. 정말 큰 느티나무였다. 아버지 어릴적에도 이 나문 컸었단다. 하지만 육십년 전이니 아마 이렇게까진 크지 않았을 거다. 그저 어린 아버지 기억에만 클 뿐. 느티나무가 워낙 커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거대한 느티나무에 손을 대고 잠시 기대어보았다. 

느티나무.. 예로부터 마을 입구에 서서 마을을 지켜주고.. 그런 나무 아닌가. 그래서 느티나무를 잡고 몰래 소원을 빌었다. '나 잘먹고 잘살게 해주세요.' 아버지쪽을 흘끔 쳐다보니 아버지도 느티나무에 손을 짚고 계셨다. '무슨 생각 하셨어요?' 꽤 한참을 느티나무에 손을 대고 계시길래 궁금해 여쭤봤다. '앞으로 너희들 잘되라고 빌었다.' 이런 건가 보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것이.

집은 어떻게 됐을까? 없어졌을지 몰라 걱정했던 옛날 아버지의 집은 다행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사극에서나 보던 멋들어진 옛날 기와집이다. 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듯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대문이 잠겨져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대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런 우리가 수상했는데 옆집에서 노인 한분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 집이 예전에 제 아버지가 사시던 집이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모시고..'
'얼마나 예전?'
'한 육십년전쯤요'
그러자 대뜸 그 노인 '그럼 석태네유?'

석태? 우리 막내 작은아버지? 깜짝 놀란 아버지. 그 노인을 자세히 보신다. 그 노인도 아버질 자세히 쳐다 보고.. 일견에 아래위가 정해진다. 그 노인이 먼저 아버지께 깍듯이 인사를 한다. '아저씨..아니 형님..저 석태 친굽니다' 막내 작은아버지의 어릴적 친구 분이시랜다. 그 노인은 비교적 정확히 아버질 기억하고 있었다. '아 그래 그래' 하지만 아버지 눈치를 보니 아버진 그 노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 했다. '아마 그때 제가 어려서 형님은 제가 기억 잘 안나실거유' 두분이 한동안 옛날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아 참.. 집에 들어가보셔야지유. 주인은 지금 미국에 가 있는데 제가 열쇠를 맡고 있어유' 그가 집 대문을 열었다.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육십년만에 돌아온 고향집 아니든가. 어찌 심경이 굳지 않으실까.. 안채 사랑채 행랑채.. 모두 옛날 그대로라고 했다. 아버지의 굳었던 표정은 곧 환하게 풀렸다. 집안팎을 둘러보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너무나 가볍다. 여기는 뭐였고, 여기엔 뭐가 있었고,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웃음이 가득한 아버지의 늙은 얼굴에서 사진에서 봤었던 그의 소년시절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아버지도 소년시절이 있었지.. 흥분에 겨워 이어지던 아버지의 말이 갑자기 멈춰졌다. 발걸음도 한곳에서 멈춰졌다. '부엌'입구였다. 

아버진 아무말 없이 한참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그렇다. 아버지의 어머니였다. 아버진 당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신 거였다. 머리맡에 항상 사진으로 두고 보시던 그의 어머니를 손끝에 다을만큼 가깝게 보고 계셨던 거다. 아버지가 부엌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아버진 그곳의 살림들을 만져보고 계셨다.

'할머니 생각하세요?'
'그래'

할아버지가 계셨었다던 사랑채 앞에서도 잠시 머무셨다. 그러나 들어가보지는 않으신다.

'할아버지가 많이 엄하셨나봐요?ㅋㅋ'
'그래'

한동안 집을 둘러보시곤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평상에 앉으신다. 말씀이 없으시다. 내가 어찌 아버지의 심경을 짐작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그냥 멀찌감치 서서 아버지가 시간여행을 마치시길 기다리기로 했다.

'... 이제 그만 가자'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있으련가. 이것이 그의 마지막 귀향이 될지도 모르는데..
'잘데 있으면 하루 자고 내일 가죠 뭐'
'아니다 됐다. 그만 올라가자'

올라오는 내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머지않아 돌아갈 고향과 머지않아 만나게 될 어머니를 생각하시나보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간지가 벌써 2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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