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얘기

매복중.. GP소대원과의 위험한 조우

80년대 초중반.. 그날 우리가 들어가야 할 매복지점은 통문에서 무려 두시간 가까이 걸어들어가야 할 먼 지점이었다. 분사분계선 근처였다. 물론 수색작전이었다면 한시간이면 족하지만 매복걸음이었기 때문에 두시간정도 걸리는 거였다. 통문을 통과하여 십분쯤 걸었을까.. 느닷없이 매복조장 선임하사로부터 매복진지를 변경한다는 지시를 전달받았다. 그 양반도 오래 걷기가 귀찮았던 모양이다. ‘선임하사 파이팅..’

선임하사는 매복조를 근처 어느 산등성이로 인솔하고 있었다. 근데 선임하사 쉐이, 확실히 알고 가는걸까? 여기 지뢰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선임하사님..이 길 아시는 길입니까?’ 분대장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큰소리도 대답이 왔다. ‘안다 씹새꺄’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래도 불안한데 너무 멀리 올라가지 말고 그냥 이 근처에서 자리 잡죠..' 그래서 별로 올라가지도 않고 대충 길 근처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았다.

매복위치를 대충 점검하고 장비들도 위치시킨 후, 막연히 새벽만을 기다리는 기나긴 밤이 시작되었다. 이 지루한 오늘 밤을 또 뭐 하면서 버티나..띠바. 그러나 지루하던 그밤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밤으로 돌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 두시경.. 갑자기 멀리 무전병의 무전기서 쉭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임하사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GP 병력교대 있다는데요’
‘머? 병력교대?'

[GP소대는 두달에 한번씩 병력이 통째로 교대한다. 교대할 병력은 미리미리 낮에 들어가지만, 나오는 병력은 보안상 '불시에' 새벽에 나온다.]

'아 씨바 좃됐다.’

그랬었다. 그날 우리의 원래 매복위치는 GP 를 훨씬 지나 군사 분계선 바로 앞쪽이었으므로 GP의 병력교대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GP병력이 철수하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교대병력이 나오는 바로 그 길목 옆이다. 우리 매복조 위치와 GP병력이 지나갈 길과의 거리가 100 미터도 채 안된다.

'그 새끼들 병력철수가 뭐 그리 대단한 군사기밀이라고 그걸 이렇게 직전에야 알려주나.. 씨바.' 하지만 이미 늦었다. GP 병력과 맞부닥치지 않으려면 빨리 자리를 길에서 먼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걔네들이 지금 어디쯤 오고있는지 알 길이 없다. 괜히 움직였다간 오인사격받기 십상이다. 아 띠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비무장지대, 새벽 두시.
날탱이 매복조가 도둑고양이처럼 산등성에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GP 소대원들.. 그들은 모두가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사격자세로 온다. 저거떨은 언제라도 수상한 것이 느껴지면 곧바로 사격을 개시할 거다. 교육받은 그대로.

우리가 여기 있다고 그 쪽 애들에게 알리려면, 무전기를 통해 본부에 알리고 본부에서 저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린 단체로 영창이다. 무단으로 매복위치를 이탈했으니까.. 그렇다고 버티자니 누가 우리중 기침이라도 하는 놈이 있으면 저쪽에서 엉겁결에 사격하는 넘이 생기고 그러면 걔들이 덩달아 사격을 가할 게 뻔하다. 그럼 우린 벌집이 된다. 이거 진짜로 큰일났다. 그때였다.

‘GP애들 보입니다.’
야간투시경을 보던 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리가 숨어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완전무장한 병력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니.. 안전장치 풀고 사격자세를 취한 30명의 병력. 난생 처음 겪는 이 골 때리는 상황.. 아 띠바 아 띠바..

달이 어슴푸레 밝았던 그날, 드디어 우리쪽으로 이동하는 GP 소대병력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난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저승사자처럼 걸어나오는 시커먼 그림자들.. 우리 선임하사의 나즈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숨소리도 내지마라.’

점점 다가온다. 30명 병력의 군화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들리기 시작한다. 걸음소리가 꽤나 크다.
군기 빠진 GP 새끼들.. 매복걸음이 영 개판이군.. 하지만 그걸 탓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제발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오지 않게 해주소서.. 간절히 기도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을 거다. 목숨을 건 기도..

누가 기침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바로 큰소리로 '우리 매복조다. 간첩 아니다' 고함을 질러야겠지. 근데 이 새벽에 갑자기 고함 소릴 들으면 쟤들이 그걸 귀담아 들을까? 오히려 깜짝 놀라서 사격을 가하지 않을까? 그래 아무래도 그럴거 같다. 간첩 아니랜다고 쟤네들이 믿을 리도 없고.. 이거 도대체 방법이 없다. 매복조 전원이 기침 재채기 안하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가만 있어봐라.. 만약 집중사격을 당해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어디로 가지? 국립묘지로 가나? 천만에 말씀이다. 매복위치 이탈해서 땡떙이 치다가 총 맞아 죽은 놈들을 국립묘지에 묻어줄 리가 없다. 그냥 개죽음이다.

200미터전, 100미터전..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자기 심장뛰는 소리가 들릴때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다행히 아직까진 아무도 기침하거나 인기척을 내는 넘이 없다. 제발 제발.. 5분만 더.

GP 쉐이덜 평소부터 군기빠져있는 줄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거떨 가만 들어보니 이동중에 잡담들을 한다. 허긴 우리들도 매복 이동중에 잡담을 하긴 한다. 나는 똥까지 눠봤다. 그러나 우리는 일년내내 낮이고 밤이고 이곳을 돌아댕기다보니 이곳을 익숙하게 궤뚫고 있지만, 저거떨은 아니다. GP에만 박혀있다가 길만 따라 나오는 애들이다. 쟤덜은 저렇게 잡담하면 안된다.

가까이 오니 더 가관이다. 아예 웅성거린다.
'저게 군대야 양아치 새끼들이야..'

그래도 장전된 총에 손가락을 걸고 있는 넘들이다. 우습게 보면 안된다. 하지만 저거떨.. 딱 당나라 군대다. 허긴 비무장지대 이 지역에 자기네 외에 다른 병력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테니 웅성거릴만도 하지.. 게다가 쟤네들은 나가자 마자 바로 휴가나가는데. 그렇게 웅성거리는 병력이 우리 앞을 통과하고 멀리 통문에 도착해 통문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선임하사의 입이 떨어졌다. ‘씨바 끝났다’

극도의 긴장된 시간이 끝나고 모두들 한숨을 몰아쉬었다. 살았다.. 새벽이 밝았다. 우리 매복조도 철수 시작.. 선임하사가 은근히 협박을 한다. '오늘 얘기.. 절대 하면 안된다. 전부 바로 영창이다.' ‘혹시 선임하사님만 가시는거 아닙니까? 우리들은 군기교육대 정도로 끝나고?’ ‘니들도 다 영창 간다니까, 말을 못믿어..씨바’ 역전의 용사 김xx 중사. 직업군인. 그냥 그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진짜 제대할때까지 아무 얘기도 안했다. 그날 우리를 지나쳐갔던 GP소대원중에 내 동기도 두넘 있었다. GP교대할때마다 두어달씩 나랑 같이 지냈는데도, 그넘들에게마저 아무 말 안했었다. 재미로 얘기했다가 말 퍼지면.. 혹시나 진짜로 영창 갈까봐.

---

GP 소대.. 이등병 시절, GP소대장 하나가 날 꼭 GP로 데리고 가겠노라고 했었다. 마침 두명이 전역해서 두넘을 새로 뽑아야 한댄다. GP엔 냉장고도 있고 특식도 널려있고, 근무 석달 끝나면 보름 휴가를 간다. 그리곤 두달 어영부영 철책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다시 들어가고. 완전히 꿈같은 군대다. 근데 중대장이 안된다고 막았다. 대신 내 동기넘 둘이 거길 들어갔다. 중대장이 야속했다. 하지만 중대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니 거기 들어가모 바보된다.. 다 닐 위해 그런기다’

수색작전 들어갔다가 어쩌다 가끔 GP에 올라갈 때가 있다. 땀을 비오듯 흘리는 우리들에게 냉장고에서 시원한 얼음물을 따라준다. 내무반 시설이 완전 신식이다. 티비도 칼라다. 기타도 두대나 있다. 동기넘 하나가 나와서 반긴다. 한넘은 지금 자고 있댄다. ‘아 띠바 내가 여기 왔어야 하는건데..’ 아쉽다. 난 이 좃뻉이를 치고 있는데..

GP에 있는 ‘얼굴 하얀’ 동기가 ‘얼굴이 석탄같은’ 내게 얘기했다.

‘너 여기 안오길 정말 잘했어..여기 지옥이야 지옥, 미칠거 같어’
‘이 쎼이가 편하니까 군기가 빠져서..’
‘아냐 정말이야.. 진짜로 미치겠어..’

---

엊그제 한국의 어느 GP소대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GP 근무를 몹시 못견뎌 하던 내 동기들이 떠오른다. '나성'이라는 절해고도의 GP에 근무하는 윤병장의 모습도 보이고. 씨바

'옛날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광복동 '하야타'의 피아니스트  (0) 2005.07.05
완월동 블루스  (0) 2005.07.04
흑석동 벽돌집  (0) 2001.09.22
아버지와 함께 했던 마지막 나들이  (1) 2001.05.12
다신 찾지 못한 갯마을  (0) 2001.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