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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완월동 블루스

해운대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식사내내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의 심정이 아마 이렇겠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 가세요? 완월동이요.. 목적지만 간단히 말하고는 그것으로 끝, 택시가 달리는 한시간 내내 역시 아무말이 없었다. 옆으로 슬쩍 넘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창밖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이 넘 역시 사뭇 비장한 표정이다. 택시기사가 거울로 흘끔흘끔 보는걸 느꼈다. 안다. 속으로 그러겠지.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들이..

다짐했다. 이왕 가는 거, 폼나게 놀아야지.. 어리다고 얕잡아보지 못하게 노련하게 굴어야지.. 
그 때 느닷없이 기사가 묻는다.

‘아시는 데 있습니까?’
‘없는데요, 아저씨가 알아서 내려주세요’

형형색색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드디어 왔구나.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침착하자..침착하자.. 술을 꽤 마셨는데도 말짱하다, 한병 더 해야 했던건데.. 이리 말짱해서야 어디 원.. 시계를 보니 거의 열두시가 다 되어간다. 좁다란 골목길 양쪽으로 집들이 즐비하다. 어떤집은 이삼층, 어떤집은 칠팔층도 더 되어보이고..양쪽으로 빈틈이 없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예전 책에서 봤던 장면하고는 조금 다르다. 너무 조용하고 차분하다. 흐느적대는 술꾼들도 없고 잡아끄는 삐끼들도 없고 천박하게 호객하는 아가씨들도 없다. 갈등이 다시 일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건가.. 그냥 가자고 하면 이넘이 날 쪼다로 보겠지. 두고두고 친구들한테 소문을 내겠지. 다 와서 도망갔다고. ‘그래 죽이기야 하겠냐’

기사가 차를 세워 내려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더니 돌아왔다.
‘이 집에서 아주 잘해드릴 겁니다’


웬 아줌마에게 팔짱이 끼워진채 가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진열대에 나란히 놓여 주인을 기다리는 인형들이 있었다. 한국 전통인형가게다. 근데 연두색 파란색 형광등 불빛이 좀 지나치다 싶다. 인형의 원래 색깔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거다. 그 중에 맘에 드는 인형을 고르란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번엔 코를 확 찌르는 향수냄새. 정신이 없다. 시간이 늦어서 그렇지 원래는 이거보다 훨씬 더 많대나. 그랬다. 남은 인형이 몇 개 안된다. 선택의 폭이 무지하게 좁다. 막상 고르려니 다 그 인형이 그 인형이다. 한개 빼놓곤 제품이 영 아니다. 근데 아뿔싸 우리 둘의 선택이 겹쳤다. 할 수 없이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졌다. 그렇게 두번째 인형을 골랐다.

인형들이 사는 방으로 올라갔다. 서너평쯤 되어 보이는 방에 아기자기한 옷장이며 화장대, 그리고 널찍한 침대, 비쌀것 같지 않은 분냄새가 방안 가득하다. 인형을 돌아보니 그새 한복을 벗어버리고 일상복을 입고 있다. 차분한 불빛에 제대로 보인다. 생각보다 꽤 괜찮다. 다행이다. 무슨말을 처음 해야 하나 가슴이 답답한데.. 다행히 인형이 모든걸 알아서 해준다. 말도 재밌게 잘한다. 난 그저 대답만 하면 됐다. 내가 새파랗게 어리다는게 보일텐데 다행히 내색을 안한다. 그것도 참 다행이다. 초장에 반말로 기선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거 잘 안된다. 반말 존대말 섞여 나온다. 인형도 따라 그런다. 어색하지만 그런대로 재밌다.

넷이 한방에 다시 모였다. 미리 그러기로 했었던 거다. 어색한 분위기를 좀 깨 보려고. 보통 불빛에 보니 내가 고른 인형이 더 낫다. 가위바위보에서 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확 든다. 서울서 미리 준비해 온 양주 한병을 넷이서 깠다. 의외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서 좋다. 분위기 난 김에 넷이서 송도로 갔다. 통금이 시퍼렇게 있던 시절이었지만 부산 그 바닷가는 관광..어쩌고 해서 통금이 없댄다. 바닷가에서 한잔 더 했다. 술이 들어가자 인형들인지 여자친구들인지 구분이 안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거칠고 쌍말해대는 인형들이 아니다. 인형들에게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드디어 둘씩 둘씩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는 너없이 너는 나없이 혼자서 헤쳐나가야 할 시간이다. 무언의 파이팅을 외치고 각자 방으로 향했다. 힘내라. 아침에 보자.

기껏 술이 올랐었는데 다시 술이 깬다. 하지만 이젠 ‘공격앞으로’ 밖엔 없다. 전쟁터에 처음 나온 신참 소위가 헤매고 있다. 다행히 상대가 백전노장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언제 봐도 참 편하다. 게다가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있다. 절대로 자기가 앞장서지 않는다. 친절한 하사관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준다. 참 고마운 인형이다.

담날 아침.. 아침밥까지 준다는데 맨정신에 그집에 앉아서 아침밥상까지 받고 나오기는 아무래도 좀 그랬다. 부리나케 그 집을 나왔다. 문앞까지 배웅을 나와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이게 뭘까.. 그곳에 남아야 하는 인형들.. 순간 슬픔같은 게 잠깐 스쳤다. 가벼운 웃음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길을 나섰다.

81년 1월 玩月洞을 다녀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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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대표적인 집창촌 '완월동'이 주상복합형 상업,업무 지구로 변모한다는 기사가 났다.  1911년 ‘미도리마치’라는 홍등가로 시작했다던 유서깊은 이 완월동이 거의 1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단다. 추억이라고 말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그 완월동이 없어진다니.. 좀 서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