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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부산 광복동 '하야타'의 피아니스트

80년 말에서 81년 초 즈음, 부산 광복동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광복동 길엔 뭔가 재미난 사건이 터질 것 같은 짜릿한 설레임이 있었다. 안다. 그 길에 그런 설레임이 있었던 게 아니라.. 넘들 머리속에 뭔가 '대가리가 쪼개질듯 재미있는' 사건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 뭔가 재미나고 짜릿한 그런 일.. 

근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늘에서 떡이 저절로 우리 입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우린 떡 따먹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어둠이 깔린 광복동 남포동 길을 무작정 걸어 댕기기만 했었다. 아 띠바 다리 아프다. 작전회의.. 창이 무척 넓은 이층 다방으로 들어갔다. 서울말 쓰는 거 하나만으로도 종업원의 환대를 받았다. 창가의 자리를 얻었다. 광복동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아무리 광복동길을 바라보고 있어봐야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나가자. 

광복동길을 걸어올라가다 보니 오른쪽에 높다란 호텔이 하나 보였다. 아마 '국제호텔'이었을거다. 근데 호텔입구가 큰길에 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서 있다. 호텔 앞까지 이어진 짧은 골목길 분위기가 참으로 묘하다. 형언하긴 어렵지만 뭔가 '흐느적'댄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던 하이에나들에게 딱이다. 그래 뭔가 저곳에서 재미난 일이 생길 것 같다. 그 골목길로 들어섰다.

오른쪽에 퀘퀘한 느낌의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HAYATA. 일본 냄새도 나고..하야타..한국말 같기도 하고..
뭐하는 곳인지 설명이 없다. 설명이 없는걸로 봐서 당연히 '재미난'델꺼야.. 들어갔다.

아뿔싸. 띠바 그냥 일반 경양식집이다. 잘못 들어왔다. 우리가 돈까스 먹으려고 돌아댕기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다시 나가려는데 잠깐.. 홀 가운데에 피아노가 하나 있고 어떤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묘한 분위기의 여자다. 귀신에 홀린 듯 자리를 잡았다.

웨이터가 왔다. 주문을 세련되게 해야 할텐데.. 빠그니 이넘 노련하다. 아주 익숙하게 맥주를 시키고 안주를 시키고..아니 이 넘이 언제 이런 델 와봤지? 아무튼 일단 웨이터에게 얕잡히지는 않았겠다고 자평을 했다.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만 앉아만 있어도 사건이 벌어질까 아님 요구를 해야 되는델까? 술과 안주가 나오고 꽤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일이 안 벌어진다.

띠바. 이거 그냥 경양식집인가부다. 잘못 짚었다. 맥주나 마시고 나가야겠다.

그때였다. 당시 내가 아주 좋아하던 피아노곡이 흘러나온다. '사랑의 크리스티나'.. 직접 치는건가? 커튼 사이로 피아노쪽을 흘낏봤다. 아까 들어올 때 봤던 그 여자 피아니스트가 치고 있는 음악이다. 피아노치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다소곳하면서 무표정하다. 뭔지 모를 매력이 있다. 아마 빠그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한번 이 자리로 불러볼까?'
'그거 되겠냐? 피아니스튼데'
'광복동 술집인데.. 한번 물어나 보지 뭐'

이넘 익숙하게 웨이터를 부르더니, 더 익숙하게 팁을 턱 쥐어주면서 부탁을 한다.
'저 피아노 치는 분 좀 뵐 수 있을까요..'

놀랬다. 빠그니 이넘에게 이런 능력이..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존경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여자가 오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하나. 환하게 웃어야 하나 웃으면 촌스러워 보일테니 그냥 노련하게 인사나 하나.. 머리 속이 복잡했다. 잠시후. 커튼이 살짝 젖혀지더니 그 피아니스트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아주 부드러운 부산 사투리다. 무표정하던 그 미지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우리와 좌석을 같이 한거다. 말문이 콱 막힌다. 그 여자..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맥주 한잔을 따르더니 조용하게 마신다. 가까이서 보니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어색한 적막을 깬 건 또 빠그니였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요..이 친구가 조금전 그 노래를 참 좋아한다네요..허허'

아니 이 시키..이런 작업구라 도대체 어디서 배웠지? 맥주가 몇잔 돌고..분위기가 어느정도 익숙해 져서야 난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건 빠그니보다 내가 좀 더 재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닥친 현장에선.. 빠그니의 독무대였다. 배워도 한참 더 배워야겠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분위기가 좋았었다는 건 우리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음날 그 여자가 점심을 사기로 했던 거다. 냉면인가 국수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는데 자기가 거기서 점심을 사겠단다. 잘하면 진짜 재미난 일이 생길 것 같다.

담날 점심때.. 국제호텔 커피샾에서 둘이 앉아서 기다렸다.
'정말 이 여자 나올까?'
'글쎄다. 우리가 사달라고 한것도 아니고 자기가 사겠다고 한거니까 나오겠지'
...

'좀 늦었습니다.'
그 여자 정말 나왔다. 거기서 밥 먹고, 용두산 공원에도 놀러가고, 호텔 나이트 클럽에도 가고..
그렇게 며칠을 그 여자와 보냈다. 서로 통했던 거다. 하지만 다른 '일'은 없었다. 늘 2:1 이었으므로..ㅋ 서울로 올라올때.. 전화번호를 줬다. '서울 올일 있으면 꼭 전화해요'

---

몇달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부산역인데예.. 밤차타고 서울갑니다. 서울역 도착은 아침 여덟십니다'

허걱-

큰일났다. 빠그니에게 바로 전활했다. 일이 있어서 자긴 내일 안된댄다. 나보고 혼자 나가랜다. 띠바 나혼자 다 감당하라고? 아침에 서울역에 나갔다. 피아니스트가 정말 기차를 타고 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받아주려는데.. 어? 가방이 무지하게 크다.

'웬 가방이 이렇게 커요?'
'아주 온깁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뭐? 아주 왔다고?

여기저기 댕기다가 학교 근처에까지 갔었는데다가 마침 지나가던 여자동기들에게 그 장면을 들켰다. 친구들이라고 하자 그 여자 갑자기 '찜해야지' 하면서 장난으로 팔짱을 낀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끌고 가고 한 여자가 옆에 붙어 팔짱을 끼고 있고.. '신혼여행 가니? ㅋㅋㅋ' 얘기 돌게 생겼다.

'쟤 부산가서 사고쳤는데, 그 여자가 서울까지 짐싸들고 올라왔다더라'

밤이 되었다. 소공동 근처 어디에 방을 잡았다. 배고프다며 밥을 시킨다. 여관에서 밥도 시켜 먹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근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그렇게 먹었다. 머리속이 무지하게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친척분들 안계세요?'
'아는 사람요? 자기보러 왔다 아입니까'

배시시 웃는다. 허걱? 근데 이게 내 표정에 그대로 나왔었나보다.
'농담이라요 참..놀래긴 와그리 놀랍니까? 내가 무섭어예?.. ㅎㅎㅎ 내 먼저 샤워할랍니다'

먼저 샤워? 머리속에서 난리가 났다. 어떡할까? 분위기타면서 그냥 있을까?  아님 오늘은 집에 갈까? 만약 그냥 있으면서 성을 쌓으면..그 담엔 어떻게 되나.. 내가 책임져야 하나? 설마 부산에서 서울까지 진짜로 나를 보려고 온건 아니겠지.. 까짓거 괜찮을지도 몰라.. 근데 만약 아니면?.. 여자가 샤워를 하는동안 엎치락 뒤치락.. 드디어 결론을 냈다. 오늘은 일단 집에 가기로. 오늘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또 있을 것이므로. 여자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다.

'나 지금 집에 가야됩니다'
'집에예?'
'내일 교련수업이 있는데.. 교련복이 집에 있거등요..'
기껏 핑계를 댄게 교련복 타령이다.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읽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무표정이다.

'내 전화 하께요'
'그래요 전화해요'

그렇게 거길 나왔다. 기분이 착잡했다. 잘 한거 같기도 하고 넝쿨채 굴러들어온 호박을 차버린거 같기도 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이상스런 기분으로.


오늘은 이정도만..ㅎㅎㅎ


어제 완월동이 사라져버린다는  얘길 듣고 그 얘길하다가 얘기가 번져서,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피아니스트, 그 이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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