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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얘기

쉘부르의 이태원

아마 81년 늦은 가을이었을 겁니다쉘부르 혹시 가봤어요?’ 데이트랍시고 만나 학교 뒤 싸구려 소줏집에서 여학생이 제게 한 말입니다. 저의 '노는 수준'을 떠보기 위한 거였을 겁니다. ‘아 거기.. 쌩으로 기타치고 노래하는데. 그래요. 담에 거기 한번 갑시다’ 마치 가봤었던 듯 얘기 했었지만 사실은 한번도 안 가봤었습니다


일단 그곳이 어떤 곳인지 익혀두긴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 모르니까. 그래서 친구 하나와 함께 쉘부르를 염탐하러 찾아 갔습니다. 처음 들어선 명동의 쉘부르.. 명성과는 달리 입구도 초라했고, 내부 시설도 그저 그랬었습다. 술집 특유의 담배냄새 술냄새도 있었고. 


비교적 한가한 시간, 그래서 무대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가수들이 나와서 뻔한 곡들, 이름 모를 소녀.. 뭐 이런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엔 공짜로 노래하는 초짜들만 나온다더라.. 그래서 곧 지루해졌습니다. 기본으로 시켰었던 맥주도 다 떨어지고, 분위기 염탐 다 했으니 그만 갈까 생각하며 무심코 무대 위를 봤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나가려다가.. 어 근데? 저 사람? 아는 얼굴이잖아..  그러나 정확히 누군지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전혀 모르겠답니다. 아.. 저 사람 누구더라..누구더라.. 결국 떠 올랐습니다


'얼간이의 첫사랑'을 부른 쉐그린’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이거 왜 이럿세여'를 하던 오른쪽 사람 말고, 비교적 조용하게 노래만 하던 왼쪽 사람.

대마초 사건으로 한동안 안 보이더니.. 여기서 노래를 하고 있었구나.. 생계를 위해서.. 한때 잘 나가던 가수가 이런 데서, 그것도 이렇게 한가한 시간에 노랠 하고 있다니.. 좀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반갑게 아는 체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내시라고.. 그래서 노래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아는 체를 했습니다. ‘.. 예전 쉐그린 하시던 그분 맞으시죠?’ 그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맞습니다. 기억해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이런 데서 노래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에 대해 자격지심이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 하나하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다니,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저 팬이었습니다. 근데 두 분이서 안 하시고 혼자 하시네요..’ 굳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도 그냥 네-하며 웃고 맙니다. 아마 싸웠을 거야.. 팀 같이 하다가 헤어지는 게 대부분 싸워서 헤어지는 거라더라.. 그가 노래를 다 마치고 내려갈 때 정말 열심히 박수를 쳐줬습니다. 힘내세요. 꼭 재기해서 이런 곳에서 벗어나세요.. 


근데 그의 이름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었습니다쉐그린의 또 한명 '전언수'는 기억나는데도 말입니다. 집에 와서 여기저기 뒤적거리고서야 그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이태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전언수에 가려져 있던 이름이었던 겁니다. 그리곤 다시 잊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어느 날, 그가 불쑥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 유명했던 '솔개'를 들고서 말입니다. 노래는 따라 불렀지만 첨엔 그가 그인 줄 전혀 몰랐었습니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가 그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쉘부르에서 쓸쓸하게 노래하던 이태원.. 진심으로 기뻤습니다다행히 솔개 이후에도 몇 곡 더 히트했습니다. 이제 저 양반 살림도 좀 나아지겠구나.. 흐뭇했습니다. 그리곤 또 오래도록 잊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우연히 '쉘부르 동창..' 이란 기사 제목을 보고 클릭했습니다. 예전 쉘부르에서 노래했었던 멤버들이 다시 만나서 공연을 한답니다. '세시봉' 멤버들의 다음 후배쯤 되는 사람들이겠습니다. 기사 뒷 부분을 읽다가.. 한동안 헛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태원.. 그 옛날 쉘부르에서 노래하던 시절.. 빈 시간을 땜빵하던 불쌍한 가수가 아니라, 당시 쉘부르를 운영하시던 공동 사장님이셨었답니다. 그리고 전언수씨와도 여전히 사이좋게 잘 지내시고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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