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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오라는 레이븐은 안 오고..

새 밥그릇이 원래 하나였다. 밥그릇 하나에 물그릇 하나.. 그릇에 물과 모이를 놓고 휘파람을 불면 득달같이 새들이 나타나는데, 방울새 너댓마리에 산까치 한두마리 정도였었다. 근데 동네에 소문이 퍼졌는지 이제는 휘파람을 불면 열댓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몰리기도 한다. 방울새 산까치 지빠귀 박새 멧비둘기.. 그러면 밥그릇 주변은 한 순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밥그릇 하나 놓고 정말 치열하게 싸운다. 얼마나들 요란하게 싸우는지 플라스틱 밥그릇이 뒤집히고 일쑤고 때론 덱 아래로 떨어져 있기까지 한다.


처음엔 그걸 재밌어 했었다. 싸움구경.. 하지만 먹고 살겠다고 피터지게 싸우는 걸 내가 즐겨서야.. 그래서 새들의 식사시간에 평화를 보장해주기 위해 밥그릇을 세 개로 늘렸다. 쉽게 흔들리지 않게끔 무게가 좀 나가는 것들로 샀다. 새 밥그릇치곤 좀 비싸서 마눌님께 한소리 들었다. 그리고 각각 다른 모이를 따로 놓아 그릇을 서로 떼어 놓았다. 빵조각 좋아하는 지빠귀는 이쪽에, 땅콩이나 해바라기씨 좋아하는 산까치는 이쪽에, 좁쌀 좋아하는 작은 놈들은 이쪽에.. 이랬더니 그제서야 안정이 좀 된다. 큰 애들과 작은 애들이 의외로 사이좋게 나란히 먹기도 하고, 같은 크기나 같은 종들은 적당히 떨어져서 먹는다. 이것이 새들 세계의 질서인 모양이다. 가끔 싸우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전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지는 않는다.

이 밥그릇 소문이 하늘 높이까지 났나보다. 언제부터인가 커다란 검은 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이를 먹던 다른 새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화들짝 날아가면.. 삼사초 뒤 시커먼 새가 나타난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혹시 이놈들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레이븐(raven)? 하지만 레이븐이라고 하기엔 크기가 좀 작아 보인다. 물론 조류전문가가 아닌 이상 따로따로 보고 크로우와 레이븐을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머리통과 부리도 너무 날씬하다. 레이븐은 약간 '가분수' 느낌이 나야하는데 얘들은 그렇지 않은 거다. 하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청소년 레이븐'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의심스런 점이 또 있다. 이 놈들이 먹이를 먹으면서 하늘을 극도로 경계한다는 점.. 뭐가 무서워서 하늘을 저렇게 경계하나? 계곡 건너편 붉은꼬리매는 우리동네에 얼씬도 못한다. 나타났다간 곧바로 레이븐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크기도 비슷한데다가 레이븐이 훨씬 영리하기 때문에 1:1로 붙어도 매가 일방적으로 밀린다따라서 저 놈들이 레이븐이라면 하늘을 경계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놈들은 크로우(crow)?.. 하지만 '울음소리'를 듣거나 '나는 형태' 혹은 비행중 '꼬리 모양'을 봐야 그걸 인정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난간에 앉아있던 놈이 커다랗게 울어 제낀다. 기회다. 울음소리로는 명확히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 띠바.. '하이-톤'이었다. 명백한 크로우 울음소리.. 그리고 결정적인 다른 증거도 봤다. 우리집 위 하늘에서 이놈들을 공격하는 레이븐을 목격한 것이다. 엄청난 크기 차이.. 그건 성년 레이븐과 청소년 레이븐의 크기 차이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판명났다. 우리집에 나타난 이 놈들은 '크로우'다. 까.마.귀.


오라는 레이븐은 안 오고 띠바..

이 까마귀들.. 쫓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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