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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진숙 기자에 대한 이해

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

내가 기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단 세 명이다. 이중 두 명은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이니 결국 한 명뿐이다. 그 유명한 mbc이진숙 기자다.

다들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이라크 전쟁때문이다. 대부분 기자들이 몸을 피해 요르단 취재를 할 때 이진숙은 홀로 이라크 현장에서 취재를 했었던 맹렬 기자였다. 하지만 솔직히 그녀에 대해 내가 가졌던 첫 느낌은 이랬었다.

외모와 사투리 컴플렉스를 깡으로 극복..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거는 무서운 여자..’ ^^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생겨나기 시작했었던 거다. 동기가 뭐였든 간에 남자들도 무서워 꼬리를 뺀 전쟁터의 복판에 들어간 그녀.. 그녀의 놀라운 용기와 투철한 직업정신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기자정신을 올곧게 지키는 진짜 기자..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잠시 미국 특파원으로 얼굴을 비추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의 얼굴이 티비에서 사라졌었다. 내가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국뉴스를 자주 못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퇴사했나? 데스크로 영전했나결혼은 했을까? 사소한 궁금증들을 남기고 그녀가 잊혀지려는 무렵, 그녀의 반가운 얼굴을 무릎팍도사에서 봤다. 이장희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날 섭외하러온 온 사람들중 내 친한 친구의 부인이 이진숙..’

 

부인? 결혼을 했는데 좀 노땅이랑 했구나^^ 어쨌든 다행이다. 게다가 퇴사한 게 아니라 mbc의 홍보국장이시란다. 근데 홍보국장? 방송사에도 홍보담당 부서가 있었나? 좀 의아했지만 아무튼 국장에까지 오른 그녀를 진심으로 축하했었다. 이진숙이라면 충분히 자격 있지.. 

 

 

이진숙도 물러나라?

그리고 또 잊혀졌었다. 그러다 어제 다시 그녀의 모습을 봤다. 인터넷으로 본 ‘제대로 뉴스에서였다이번에 본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농성중인 mbc 조합원들이 김재철은 물러나라구호와 함께 이진숙도 물러나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엘리베이터안에서 후배들의 퇴진구호에 슬쩍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있었다아니 이진숙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물러나라는 소릴 듣고 있는 거지?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고서야 그간의 과정을 알게 되었다. 이명박에 의해 내려온 김재철에게 발탁된 이진숙 홍보국장, 김재철의 대변인 충견.. 깜짝 놀랐다. 아니 이진숙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흥분하기 전에 따져볼 게 있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중용하는 보스에게 충성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줄서기 경쟁이 치열할 때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해 우린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권력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인간에게 공통적인 욕망이다보스의 눈에 들면 조직에서 계속 살아남아 권력을 유지하고, 눈에서 벗어나면 반골이나 투사가 되는 게 우리네의 일상이다. 우리가 이렇듯 이진숙도 우리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자기를 중용해준 김재철 사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개인 이진숙의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녀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권력지향적인지 자유로운 인간인지, 언론의 역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따라서 인간 이진숙이 보이고 있는 현재모습 혹은 변신(자의든 타의든 혹은 원래 모습이었든)을 비난할 근거는 별로 없.

 

 

하지만 이진숙은 기자다.

그것도 대한민국 종군기자 1호의 타이틀을 가진 스타 기자, 수많은 기자 지망생들의 롤모델이었던 전설적인 기자다. 나 같은 사람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기자다. 따라서 싫든 좋든 그녀의 남은 삶엔 철저한 기자정신이 계속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기자정신.. 아마 권력의 감시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기자로 기억되는 이진숙의 삶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기자 이진숙이 홍보국장이라는 자리에 앉았다. 발탁된 내막은 모르지만 어쨌든 축하해줄 일이다. 하지만 자리가 바뀌고 나서 이진숙이 변한건 사실인 모양이다. 마치 기자정신을 망각한 듯 행동했단다.

'인간' 이진숙은 이해하지만 '기자' 이진숙이 과연 그리 해도 되는지는 의문을 가게되는 건 당연하다
. '권력의 감시자'가 갑자기 '사장권력을 지키는 사설 경호원'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좋다. 그것이 홍보국장의 임무이며 역할이기 때문에 이진숙도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일단 이해해 주기로 한다.

 

 

하지만 김재철이 누구인가?

단군이래 가장 해괴한 군주 이명박의 명으로 언론자유를 탄압하고 있는 악랄 행동대장이 바로 김재철이다. 과연 이진숙은 보직과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이 무서운 역사적 위기마저 모른 척 해도 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기자 이진숙은 이러면 안된다. 기자로서 가진 그녀의 위대한 가치를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뜨려서는 안된다. 그녀를 바라보면 기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

쓰레기더미 언론이 장악한 대한민국에서 기자라는 직업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자 이진숙은 그걸 해냈었다. 이진숙은 존재 자체로 빛나는 별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명박과 김재철의 애완견이 되었단다

 

 

이진숙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근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우리가 이진숙에 대해 뭘 제대로 알고 있지? 이진숙의 지금 모습이 변절인지 원래 그녀의 모습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리들 머리속엔 '종군기자 이진숙'만 있다. 그녀가 정권의 감시자 역할을 어떻게 했다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어떻게 고발했다거나 하는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쩌면 그동안 이라크전 종군기자이진숙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속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녀에 관해 찾아보니 저널리즘 스쿨에서 기자 지망생들에게 그녀가 강연한 자료가 있었다. 그녀는 강연에서 시종일관 이렇게 강조하고 있었다.

어떤 기사에 팩트가 10개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8개는 맞았는데, 2개는 틀렸다. 2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럴 경우에 기사의 의도가 매우 건전하고, 나머지 8개 팩트의 중요도를 고려해 넘어가줘야 할까요. 10개의 팩트 중에 1개만 틀려도 기사 전체는 오보입니다. 9개 맞춘 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틀린 1개의 팩트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기자라고 생각해요. 사죄해야 하고, 실수에서 배워야 합니다

 

강연의 전체 워딩을 보진 못했지만 요약본 어디에도 권력의 감시라든가 시시비비라는 언급이 없다기자로서 팩트에 충실하기만을 오직 강조하고 있었다책임감과 생명력있는 기자보다는 FM대로 팩트에 의해 움직이는 사이보그 기자가 되는 것이 그녀의 기자정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숙은 팩트에만 충실하던 사이보그 기자였던 것 같다.

 

 

이진숙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원래 그녀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녀의 유명세는 기자로서의 자질이나 사명감에서 온 게 아니라 독종기질하나로 이라크전 취재'에 나섰다가 '얼떨결에 얻은' 것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종군기자 이진숙'은 '사이보그 기자 이진숙'이 뜻밖의 행운으로 얻은 가공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예전에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Hero라는 게 있었다. 좀도둑이었던 주인공이 항공기 사고를 당했다가, 유명인사를 '어쩔 수 없이' 구출했는데, 그게 알려져 영웅이 되려는 순간.. 다른 놈이 그 영웅행세를 가로채고.. 이진숙이 바로 이 더스틴 호프만의 경우였던 것이다. 얼떨결에 만들어진 종군기자 이진숙..

이제 현재의 이진숙의 행동이 모두 설명된다. 팩트에 충실해 실세를 잘 파악하고, 팩트에 입각해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지독히 성실한 이진숙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기자 이진숙은 깡그리 가짜였다. 부지런한 홍보국장으로, 김재철의 경호원으로, 이명박의 나팔수로 충실하게 활약하는 이진숙을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봐야 우리만 짜증나고 피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