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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2

‘아니 왜 무식하게 그 고생을 해? 이걸로 하면 되잖아’
똥이 어디서 불 붙이는 '오일'을 가져 온다. 아 띠바 맞다. 이걸로 하면 식은 죽먹기였을걸.. 머리가 나빠 괜히 몸이 고생했다. 저게 있으니 도끼가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나무가 굵다고 도끼만 생각하는 나는 참 원시인이다. 기름을 이용하니 금새 활활 타오른다. 이 편한 걸 두고 25년전 철원 기술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비록 ‘새로움 받아들이기’에 무감한게 오히려 정상인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러지 않으리라 신경을 쓰는데도 이 ‘새로움 받아들이기’는 갈수록 미끌거린다. 문을 잠근 또래들을 안타깝게 보더니만.. 이제 보니 내가 딱 그짝 아니든가.

온전히 불이 붙은 장작을 보다가 무심코 눈을 돌려 밖을 내다보니.. 내 눈을 의심했다. 바베큐 그릴의 불길이 너무 치솟아 소나무 가지까지 불길이 올라가고 있다. 잔가지들이 그 불길의 열기에 흔들거린다. 삽시간에 불길에 잡아먹힐 태세다. 그 가지에 불이 한번 붙으면 그게 그냥 ‘산불’이다. 사람이 끌 수 없다. 산불.. 심장이 멎는 듯했다. 미국뉴스는 물론이고 한국뉴스에도 나갈 기사감이다. '미국 엘에이 근교 빅베어마운틴에 놀러왔던 철없는 한국인들이 고기를 구워먹다 부주의로 산불을 내어.. 그 한국인 부부들은 하니브로라는 정체불명의 써클 회원들로 밝혀져..' 뛰어나가 후다닥 그릴을 뒤로 밀었다. 예전 철원의 불꽃놀이가 생각났다. 아찔하다.

(이 소나무의 이 가지들이었다. 바로 요 가지밑에서 똥이 그릴을 피우는 바람에)


그때 무심한 얼굴로 똥이 나온다.
‘야 띠바야 너 산불낼뻔 했잖아’ ‘…. 그래요? 근데 안났잖아’ 
아무래도 이넘을 계속해서 주시해야 할 것 같다. 아슬아슬해 뵌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서야 산속 오두막의 분위기가 비로소 제대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솔 향기도 그제서야 콧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차가운 저녁공기도 그제서야 피부에 닿기 시작한다. 그렇지 숲속 오두막은 이래야지.. 시원한 저녁 소나무 산속의 오두막.

불길이 아직 사그러들지도 않았는데 기데보라가 삼겹살을 석쇠에 올렸다. 삽시간에 타버렸다. 아 띠바뇬.. 삼겹살 얼마 안되는데.. 건져내려다 몇 개는 밑으로 떨어뜨렸다. 아까운 삼겹살을.. 몇번 씹었더니 삼겹살은 벌써 끝이랜다. 정육점 아저씨가 삼겹살을 두개 사고 소고기를 하나 사라고 그랬었는데. 말 안들은 게 후회된다. 치맛살 소고기는 왠지 맛이 약하다. 하지만 돼지고기든 소고기든 불에 구워 김치에 싸먹는 고기맛은 일품이다. 알싸한 맥주맛이 도와주니 더욱 일품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역시 술과 고기는 좋다. 그러고보니 다 있다. 술과 고기와 여자.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게 있었다.
다 털어버리고 산속에 들어와 편안해진 마음이다. 세상만사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먹을거 많지, 술 많지, 친구들 있지, 토요일이지.. 우리는 우리대로, 기똥네는 그들대로 얼마나 남모르는 치열한 미국생활을 하고 있든가. 드럽게도 재미없는 미국생활.. 저녁 산속 고기 한점과 맥주 한잔에 미국동포들 마음이 촉촉히 편안해진다. 참 단순한 동포들같으니.


순식간에 25년 세월을 뛰어넘어 스무살 대학생들로 돌아간 사람들.
그전 쓰던 말을 하고, 그전 부르던 노래를 하고, 그전 얘기하던 화제들로 꽃을 피운다. 사십중반의 후배에게 써서는 안될 ‘씨바넘아’ 혹은 ‘네 이년’ 이 자연스레 나온다. 오랜만이겠지만 듣는 사람도 과히 불쾌해 하지 않는다. 좋다. 정말 좋다. 이 느낌 이 분위기.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부자연스런 거 모두 떼어버리고, 그 예전 달았었던 간단한 ‘선배후배동기’ 계급장만 달랑 달고 있다. 정신세계 단순해지고 언어 단순해 진다. 그래서 엉킨 것들이 느슨하게 풀리니 마음 푸근하다. 그렇다. 가끔 이러고 살아야 한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눈이 오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쉽사리 추억속으로 빠져든다. 
‘너 그때 그거 기억나? 아 그래 기억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지는 기억들 때문에 그래서 행복하다. 맞아..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들이 있었지, 우리에게도 그런 추억들이 있었지.



저녁을 먹으면서 간단하게 술 한잔 하는 것이었는데 탬파촌년이 아무래도 속도를 좀 위반하는 느낌이다. 저 혼자 연신 맥주깡을 비워댄다. 사온 맥주 저뇬이 다 먹을라..

‘오빠 노래하자 노래하자..’
그래 노래 좋지, 당연히 노랠 해야지.. 근데 문제가 있다. 노래가 도통 생각들이 안난다. 뭐하까 뭐하까? 겨우 하날 시작하면 중간에 가사가 막히고, 하나가 끝나면 뒷노래가 따라 붙어주질 않고. ‘너 노래해본 지 언젠데?’ ‘글쎄 한 십년?’ 우린 그동안 노래도 안하고 모했을까? 불쌍한 재미동포들. 

다른 집들에 방해될까 목소리를 낮춰서일까.. 가사도 가물거리지만 노래자체가 참 안된다. 이걸 해봐도 안되고 저걸 해봐도 안된다. '노래는 이따가 안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함 해보자. 소리를 제대로 크게 내야 아마 노래가 될거야.' 노래 안되는 건 그렇게 일단 뒤로 미뤄뒀다.


분위기가 급상승중인 기데보라.. 숲속의 저녁, 술과 고기 그리고 추억.. 노래하다 벌떡 일어나더니 무용을 한다. ‘언니도 같이하자’ 졸지에 언니도 끌려 일어섰다. 사십중반 아줌마들의 니나노 춤판이 아니라 스무살 계집아이들의 상큼한 몸짓이다. 즐겁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역시 놀러가는 건 옛날부터 알던 사람들하고 댕겨야 하는거야. 따져보니 우리가 알고 지낸게 어언 25년이야, 사반세기 사반세기. 내 참..


시간이 늦어지자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 눈치가 더 보인다. 워낙 조용한 곳이라 작은 목소리도 멀리 울려나가기 때문이다. 다들 자근자근 얘기하건만 한놈 목청이 크다. 거기다 뽕짝을 하다가 산타루치아를 하기도 한다. 누구누구의 영향이 분명하다. 버지니아의..

그놈 ‘똥’ 때문에 안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벽난로의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다. 갑자기 영화속의 한 장면으로 뛰어들어온 분위기다. 끈끈한 음악에 바닥에 호랑이 카펫 깔아놓고 와인잔을 기울이는 남녀..

하지만 우리 영화의 출연진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왁자지껄 덩실덩실 비틀비틀이다. 과일과 안줏거리가 준비되고 불옆에 모여 앉았다. 근데 불이 좀 뜨겁다. 아무리 높은 산속이라고 해도 6월 중순이면 여름이다. 모닥불이 좀 부담스러운 거다. 띠바. 너무 뜨겁다. 하지만 타박 받지 않으려면 저걸 다 태워 이것도 모자랐음을 보여줘야 한다. 한꺼번에 두개 세개씩 올리니 불길은 더욱 드세다.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얘들아! 자 이제부터 노래하나 제대로 해서 비디오 하나 찍자. 명색이 하니브로 엠티인데 하나는 남겨야지. 근데 흩어진 분위기가 잡히질 않는다. 어떤 노래든 서너소절 이상 넘어가질 못한다. 목소리가 안 나와.. 가사가 생각 안나.. 내 파트를 잊어먹었어.. 하다말고 깔깔 웃기만 한다.

띠바.. 포기했다.
‘그냥 이빨이나 까지’ 똥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밤이 깊어간다. 야음을 타고 시시콜콜 '사건과 실화'들이 여과없이 까발려진다. 숨겨졌던 비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세상에 나온다. 모닥불 앞이라 그런가.. 참 별 얘기들이 다 재밌다. 계속 터져나오는 감탄사, 머 진짜? 세상에.. 설마.. 때때로 오마이갓.. 미국물 좀 먹었다고.

아슬아슬 경계선을 넘나드는 똥의 얘기들.. 이러다 얘네들 나중에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흠칫 놀라 기데보라의 얼굴을 보지만 기데보라는 담담하다. 암만 봐도 니네 천생연분이야..

그러나 가만 보니 요 기데보라.. 담담한 게 아니다. 요거 취해 있다. 눈도 풀려있고 발음도 엉키기 시작한다. 요거 얼마 안 가겠다. 뭔가 이야기를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내가 벌써 왜 이러지? 이러믄 안되는데.. 오늘 끝까지 놀아야 하는데.. 씨이’
본인도 안타까운 모양이다. 저녁 먹을때부터 좀 과속을 하더니.. 날리던 ‘말술’ 기데보라도 결국 나이를 못 이기고 ‘나 졸려 나 잘래’ 하곤 일찍 퇴장하고 말았다.

이층 다락방으로 연결된 똥그란 원형사다리를 몽유병환자처럼 걸어 올라간다. ‘지따메 여기 왔구마, 씨바넘이 먼저 뻐더뿌마 우짜노?’ 핀잔을 주지만 똥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늙으니까 기데보라도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벽난로의 이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이층 다락방으로 다 몰려 올라가는데 더워서 쟤 잠 자겠나.. 근데 기데보라 잘 잔다.

하나가 빠지자 분위기가 식는다. 똥의 주절거림을 듣다가 결국 우리도 자리를 파했다.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1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2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