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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3

새벽에 목이 말라 잠이 깼다. 방에 갔다 놓은 병엔 물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 할 수 없이 부엌으로 가야 한다. 물을 마시고 들어오는데 불현듯 송충이의 악담이 생각났다. 아 띠바 이럴 때 하필 그 생각이.. 침대에 눕는데 뭔가 창밖에서 움직인다. 헉- 송충이의 말이 사실.. 근데 통북어가 너무 멀리있다. 귀찮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그냥 잤다.

술을 마시다 늦게 잤는데도 눈이 일찍 떠졌다. 다행히 속도 편하다. 어젠 몰랐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니 정면이 거울이다. 크흑.. 지난 새벽 비몽사몽 깜깜한 가운데 창밖에서 움직인 건 바로 나였다. 내가 날 희끄무레 거울로 보고 놀랜거다.

(하지만 실제로도 밖에는 이런 나무인간들이 있었다)


다락방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다. 그래서 조용조용 움직이며 물 마시고 볼일보고.. 아침 공기가 좋을테니 산책을 나가야 겠다. 그래 그거 좋겠다. 그때였다.

어젯밤 몽유병환자처럼 사다리를 올라갔던 그 여자가 다락방에서 몽롱한 표정으로 내려온다. 맞다 어젯밤 그 여자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지.. 그리곤 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몽유병환자처럼 올라간다. 과연 쟤가 지금 깨어있는 걸까 아님 몽유중일까?

잠시 기다렸지만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올라가 봤다.

(동창이 밝았는데 이러고들 있다. 사진 왼쪽 끝 발은 똥의 발이다. 둘이 각 침대를 썼다)

몽유병이 분명하다. 근데 본인에게 이거 알려줘야 하나? 너 몽유병있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뭐 다른사람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아직도 앞길이 챙챙한 애가 몽유병이라니.. 가슴이 좀 아프다.

산속 마을 참 조용하고 좋다. 비록 사막지대 캘리포니아의 산속이라 깊고 우거진 숲은 아닐지라도 길게 뻗은 소나무들의 강렬한 향이 좋다. 늙어서 이런데서 살면 어떨까? 며칠은 좋겠지만 금새 외롭고 답답해질까? 사는 집은 도시에 두고 이런데다간 따로 별장을 가지는 게 낫겠다. 기분좋은 상상을 하며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침산책을 나온 예쁜여자가 있었다. 이름을 물어보니 '야채'라고 한다)

상쾌한 이 아침시간.. 또 뭘할까.. 그래 이거 괜찮겠다. 기타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튕겨본다. 아 죽인다. 높은 산 숲속 새벽의 기타소리. 아무도 듣고 있지 않지만 혼자 치는 기타도 이런 곳에선 아주 괜찮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게 평화다.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커피가 한잔 날라져 온다. 내가 좋아하는 딱 다방커피다. 그 무렵 몽유병 그 여자도 테라스로 나왔다. 이 여자, 지금은 확실히 제정신이다. 시끄러운 똥이 아직 자고 있어 산속 새벽의 조용한 시간. 커피를 한잔씩 받쳐들고 편안하게 앉았다. 가벼운 이야기들, 살아가는 얘기,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술이 없는데도, 음악이 없는데도 이런 아침 시간 참 괜찮네. 모닝 퀄러티 타임..


나중에 늙어서 심심하면 안되니까 뭐 같이 할 취미를 만들자. 뭐 할래? 다들 음악을 좋아하니 음악을 하자. 근데 노래 안되는 거 어젯밤 확실히들 확인했으니까 앞으론 악기로 하자. 근데 니네 무슨 악기 다룰줄 알아? … 없는데. 띠바.

그러다 갑자기 기데보라가 지나가듯 던지는 말,
‘오늘 똥 생일인데..’
‘뭐? 오늘이 똥 생일? 얌마 그럼 어제 얘길했어야지’
'미리 얘기하면 언니 오빠 부담되잖아..'

사려깊고 마음이 가상한 여자인건 맞는데, 좀 골때린 마눌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케잌도 없고 샴페인도 없고.. 달랑 인스턴트 미역국만 있다. 어쩐지 어제 마켓에서 미역국을 사는게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똥에게 해줄거라곤 아침 밥상에서 '서프라이즈!' 노래뿐이다.

그 즈음 퍼질러 자던 똥이 일어나 합류하면서 그 아침의 퀄러티 타임은 끝났다.

(사람 하나 더 끼었는데 분위기는 딴판이다. 시끄럽다)

주섬주섬 아침 준비를 하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똥의 앞엔 미역국과 전복죽, 우린 달랑 북어국.. 하나 둘 셋, ‘생일추카 함미다 생일추카 함미다 사랑하는 똥..’

갑작스런 노래에 똥.. 웃고는 있지만 못내 억울한갑다.
‘씨바 남편 생일을 이레 때워뿔라꼬. 내 복수할끼다. 니 두고바라 꼭 복수할끼다.’ 
야채가 못을 박는다. ‘복수는 무슨 복수냐. 생일 부귀영화는 이걸로 끝이다’ 
그 부귀영화는 똥이 먹은 인스턴트 전복죽과 인스턴트 미역국을 말한다.

(똥의 생일상)

기.. 남편 생일 하나 간단히 치뤄버렸다. 영악한 것.
똥.. 많이 남지도 않은 생일중 하나 그냥 날려먹었다. 불쌍한 것.


자 이제 슬슬 갈 준비 할 시간이다.

(띠바, 송진이 손에 묻었다)

일박이일은 못쓰겠다. 너무 짧다. 못내 아쉬우니 자꾸 훗날을 기약한다. 얘들아.. 아무래도 모닥불 문제도 있고 하니까 담엔 겨울에 오자. 올 크리스마스나 신년을 이곳에서 보내는 게 어때? 그리고 뷰가 좀 답답했으니까 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호수가 보이는 오두막을 잡아놓으께. 여기가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한 데거든.. 니네 플로리다에 눈 오냐? 안오자너.. 눈 구경 이리루 와. 눈 수북하게 쌓인 숲속과 호수가 바라보이는 오두막 어때? 혹시 아냐? 때맞춰서 함박눈이 펑펑 내릴지.. 한 삼박사일 푹 쉬다 가자구..


(호숫가에서 발견한 한국여자들이다. 둘다 사십대 중반이라고 하는데 쓸만했다)


강원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서울 근처에선 공기의 맛이 달라지던 걸 기억한다. 새벽녘에 서울 근처에 다다르면 쓰레기냄새가 난다. 가뜩이나 돌아가기 싫은 서울에 쓰레기 냄새까지.. 물론 하루만 지나면 이 쓰레기냄새를 전혀 모르고 산다. 그렇게 쓰레기 냄새에 코가 막혀 일년을 살다가, 그리곤 일년 후 다시 그곳을 탈출한다. 하지만 며칠 후 다시 그곳으로 붙들려 간다.

호수를 떠나 산 정상에서 아랫쪽을 내려다 보니 뿌연 스모그가 자욱하다. 미국에서 공기 나쁘기로 수위를 다투는 도시 엘에이. 저 속으로 우리가 지금 돌아간다. 아 띠바다.


이들이 비행기로 다섯시간을 날아 이곳 LA에 온게 나 보자고 온건 아닐 터, 미국에서 그래도 가장 한국을 닮아있는 곳이 이곳 LA, 한국엔 못가도 그 땜방으로 고향 찾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을터인데,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내가 퍼덕대면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서울 사람이 꿈에 그리던 강원도 근덕의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하루 초당굴에서 놀다 다시 근덕으로 내려오는데 근덕사는 놈이 그 근덕 지겹다고 칭얼대는 것과 똑 같겠지? 조용히 있자.

탬파에서 먹기 힘든게 모 있을까.. 찾아보지만 이 동포들, 어젯밤 술에 입맛이 깨끗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늦은 점심에 이른 저녁까지 꾸역꾸역 먹이고 공항으로 간다. 다섯시간을 비행기안에 앉아 있으려면 얘들 얼마나 힘들까. 재미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답답한 그 비행기..

같은 미국에 살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만나기 힘들다는데 그래도 우리와 이 탬파 동포들, 지난 9년간 그래도 서너번 이상 봤다. 남들이 들으면 놀란다. 동부 서부 살면서 그렇게 자주 보는 사람들이 있냐고. 아무리 친하던 사이도 툭하면 돌아서고 웬수가 되어버리는 곳이 이곳 미국인데, 참 희귀한 경우라고.

생각할수록 그들과 우리의 정이 참 다행스럽고 고맙다. 다음엔 골프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예쁜 집, 기똥이네 부부의 집에 우리가 놀러 가야겠다. 아.. 아니구나.. 이번 겨울에 얘네들 또 오지 참.. 꼬불꼬불 멀미나는 빅베어를 또 가든, 아니면 씽씽 레잌 타호를 가든, 올 겨울엔 눈 오는 곳으로 가야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그런가, 이번주 내내 고향생각이 자꾸 나네..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1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2
→ 20년만의 하니브로 엠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