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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10년만의 눈 구경 - 씨애틀 근교 Leavenworth의 Barbarian Village

크리스마스 이브.. 씨애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평범한 동네 평범한 집의 현관에서 바라본 동네풍경이다. 나무가 어찌나 많고 분위기가 조용한지 마치 예전 송충이네랑 갔었던 강원도 둔내 산골의 통나무집 마을 같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서 알싸한 소나무향이 짙게 난다. 참 공기 맑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병없이 살다가 가볍게 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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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비가 오고 있으니 높은 곳에선 틀림없이 눈이 내리고 있을 거란다. 다같이 눈을 보러가기로 했다. 근데 무작정 북쪽 높은 지역으로 가면 되나? 동북쪽으로 100마일정도 가면 독일마을 Leavenworth란 곳이 있는데 그곳의 야경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눈길을 만날터이니 넉넉히 서너시간을 잡았다. 이 비가 중간에 눈으로 바뀔거라니까.. 장담을 하고 출발했건만 꽤 한참을 달렸는데도 내리는 빗줄기는 좀처럼 눈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길가에 쌓여있던 눈더미들이 빗줄기에 녹아내릴까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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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드디어 빗줄기가 진눈깨비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같기도 하고 우박같기도 하고 진눈깨비 같기도 한게 꽤 오래도록 내렸다. 암만 기다려도 눈으로 바뀔 조짐이 전혀 없다. 바깥 기온을 보니 화씨 32도(섭씨 0도) 이하다. 당연히 눈이 와야 할 기온인데도 여전히 진눈깨비다. 눈이 되어라.. 눈이 되어라.. 다들 눈타령을 하며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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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리하던 진눈깨비가 눈으로 바뀌고, 또 곧 풍성한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모두들 입에서 탄성소리가 나왔다. '와 눈이다! 눈이다.. 눈이다' 차안은 갑자기 흥분의 도가니.. 찬공기를 무릅쓰고 창문을 열고 눈을 직접 맞아 본다. 맞아.. 눈의 느낌이 이랬었다. 첨엔 약간 차가운 듯 하다가 곧바로 살위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이게 얼마만에 맞아보는 눈이든가. 열살 어린애, 스무살 젊은이가 되어 입을 벌린 채 경이로운 눈을 바라본다. 눈이다 눈.. 십년만에 드디어 눈이란 걸 맞아본다. 눈때문에 이렇게 감격해보긴 처음이다. 눈이다 눈..

근데 차안으로 몰아치는 눈발이 약간 거세다. 가뜩이나 차창에 김이 서려 시야를 가리는데 이것마저 들이닥치면 김이 더 서리겠다. 아쉽지만 할 수 없이 창문을 닫았다. 좀 춥기도 했고. 오랜만에 하는 눈길 운전이었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오가는 차들이 별로 없으니 미끌어지더라도 혼자서 빙글 돌면 되니까. 까짓거 눈길에 한번 쳐박혀보지 뭐..

눈발이 점점 굵어져 이젠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풍성한 함박눈이다. 그 눈을 맞으면서 한시간여쯤 더 달리니 드디어 레벤워스, 도시 이름은 레벤워스이지만 마을의 이름은 'Barbarian Village' 라고 했다. 영어에서 '야만인'이란 뜻으로 쓰이는 '바바리언'이라는 명칭을 이들 독일인의 후예들은 자랑스럽게 마을 이름에 쓰고 있다. 바바리언 빌리지.. 우리말로 하자면 '오랑캐 마을' 정도 아닌가. 바바리언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우리가 느끼는 바바리언과 그들 독일인들이 생각하는 바바리언은 분명 다른가 보다.

마을 초입부터 모든 것이 예쁘다. 주유소도 예쁘고 부동산사무실까지도 예쁘다. 그렇지만 이곳은 원래 1920년 이전까진 독일이민자들이 모여 포도 농사를 짓던 낙후된 시골이었다고 한다. 근데 그 무렵 부근의 다른 마을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그 마을이 급부상하고 이 마을은 급속히 쇠락했었다고 한다. 그 위기의 시절에 마을사람들이 돌파구를 찾기를.. 아예 농사를 줄이고 이렇게 독일 민속촌으로 꾸며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사라질 뻔 했던 농촌마을이 아주 예쁘고 볼거리 많은 관광명소로 탈바꿈하였다. 미래를 내다본 어른들의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으로 자손들이 이렇게 잘먹고 잘 살고 있다. 그 당시 마을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고 농사를 새롭게 더 일으킬 궁리를 했었다면? 지난 대선을 떠올리며 가슴이 좀 답답해졌다가 바로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런거 잊으려고 온게 아니었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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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서 맥주축제, 민속퍼레이드가 열리고 겨울엔 눈이 아름다워서 눈구경을 많이 온다고 한다. '레벤워스'의 '바바리언 빌리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맞아.. 서울 어딘가에 '레벤 호프'라는 호프집이 있었지.. 그 레벤이 이 레벤일까? 아니면 어떤가, 눈 맞으면서 독일의 정취에 빠져들면 되는거지.

그 무렵 아쉽게도 눈의 크기가 작아진다. 이러다 눈이 멎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눈발은 계속 흩날려 주었다. 암 그래야지. 우리가 여길 왜 왔는데.. 눈을 맞으며 걷다보니 그제서야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가 온통 기념품 가게인 것이 좀 실망스러웠으나 눈이 내리고 있어서였는지 전체적인 마을 분위기는 좋았다. 관광객을 위한 눈마차가 있었지만 추워서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엉덩이가 시려울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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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서 보던 '성냥팔이 소녀'가 한귀퉁이에 서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야채랑 참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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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 사진과 비교해 본다. 모자 색깔만 다르뿐 비슷한 옷이며 얼굴모습이 쌍동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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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다시 눈이 굵어져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내리기 시작했다. 펄 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눈 덩어리가 입으로도 들어오고 눈으로도 들어온다. 25년전 강원도 철원생각이 났지만 황급히 머리를 흔들어 철원땅을 털어버렸다. 아 띠바 왜 난 눈 기억이 그것밖에 없는걸까.. 머리속을 애써 비웠다. 함박눈을 맞으며 추운줄 모르고 마냥 걸어다녔다. 이쪽으로 갔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걸어나오고.. 길거리엔 개들도 주인을 따라나와 꽤 여러마리 뛰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개나 나나 똑같다. 눈이 내리니 좋아서 뛰어다니는 게.. 

방수인줄 알았는데 내 외투가 방수가 아니다. 눈이 미끌어지지 않고 안으로 스며든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온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게 얼마만에 맞아보는 눈인데.. 눈이야 눈! 언제 다시 이 눈을 맞아보겠노.. 비록 감기로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원없이 눈을 맞을 생각이다. 이번에는 길건너 저쪽으로 걸어봐야겠다. 함박눈을 맞으며 눈길을 걷는 마음이 뭔지 알아? 눈같은 하얀 마음이야. 마냥 즐겁고 피곤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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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엽서에서 본 듯한 예쁜 마을 정경. 근데 마을에 자동차가 너무 많다. 역시 이런 곳엔 차량 통행을 엄격히 금지시켜야 한다. 아예 자동차를 멀리 두고 단체로 전기자동차를 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던 스위스의 마을들이 생각났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의 대부분 관광지들도 차량통행을 금지시키는데 이곳만은 자동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 마을의 흠이었다. 마을 초입부근에 큰 주차장을 만들어놓고 차들은 전부 그곳에 세우고 사람들은 걸어다니게 했었다면 더 좋았었을 것을.. 이 그림에서 자동차들을 쏙 빼버린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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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복판 정자같은 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딱 듣기좋을만큼 계속해서 울려퍼진다. 모두 귀에 익은 캐롤들이다. 따라 흥얼거리며 눈길을 걷는다. 아이들은 눈싸움에, 썰매에,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눈 내리는 독일마을.. 어떤 동화속에서 분명히 이런 마을을 본 적이 있다. 그곳이 독일이었는지 어디 유럽의 다른 곳이었는지, 헨젤과 그레텔이 독일아이들이었는지 아니었는지..아무튼 어떤 동화에서 이런 마을을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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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워스에 왔으니 '레벤'호프를 찾자.. 그러나 겨울이라 그런지 그런 독일식 호프집은 찾을 수 없었다. '비어 팩토리'라는 안내간판이 있길래 호프집인줄 알고 들어갔더니 'Beer' 가 아니라 'Bear' factory, 곰인형을 파는 가게였다. 웃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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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뮌헨하우스'라는 노천까페에서 독일식 핫도그를 먹기로 했다. brat 이라고 했던 거 같다. 겨울이 아닌때엔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맥주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물론 그날도 맥주가 있었는데 그곳이 건물 안이 아니라 바깥이었기 때문에 추워서 맥주를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돌아가는 길에 오줌이 자주 마렵게 된다면 낭패다. 휴게소도 없는 길, 몰아치는 눈발속에서 볼일을 봐야한다. 맥주는 커녕 음료수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대신 크기가 커피잔만한 따뜻한 칠리수프를 두사람당 한개로 시켰다. 가게안 작은 광장 통나무 화로엔 다른사람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어서 우린 입구 전기난로 밑에서 핫도그와 칠리수프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다. 핫도그 맛은 그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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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중 씨애틀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로 위헙했다. 산을 넘을때마다 기후가 바뀌는지 수시로 교차하는 눈과 비.. 눈이 펑펑 오다가 갑자기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가.. 눈이 쌓였거나 비가 억수로 내리는 길에서 세시간 사투를 벌인끝에 씨애틀에 도착했다. 그래도 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눈을 보고 왔잖아.


눈이 내리면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버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눈길을 오래도록 걸으면 발이 시렵다는 사실도 오랜만에 깨달았다. 눈에 미치면 추위도 잊는다는 걸 알았다. 사진을 수도 없이 찍어봐야 일반 디지탈 카메라로는 좋은 그림이 절대 안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엔 뭐니뭐니해도 여행이 최고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대선 스트레스를 이 눈구경으로 다 풀고 왔다.

십년만의 눈구경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