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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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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봐야 나오는 거 아마 없을겁니다. 본인들도 힘들걸요? 이렇게 하기도 힘들지만 안나온 걸 나온 듯 연기하는게 아마 더 힘들겁니다.)

깨달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다 문이 열리면 ‘여기는 깨달음 매장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좇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에 대해서 잘 알려주셨잖아요. 마음이 움직이는 바를 잘 보라고. 혹시 당신은 부처님께서 주신 그 단순한 길을 두고 딴 곳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천국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고. 혹시 당신은 천국이 하늘나라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지나친 수행은 자연이 아닙니다. 수행에의 지나친 기대는 환상일 뿐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준 질서는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헛된 욕망으로 지치고, 매일매일 분노와 좌절이 널뛰듯 하고, 매력적인 이성을 보고 가슴이 꿈틀대기도 하고, 몰래 나가서 놀기도 하고, 은근슬쩍 남의 이익을 가로채기도 하고, 배신으로 금전적인 손해를 보면 살의가 치솟기도 하고, 보기 싫은 시어머니가 확 죽기를 바라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혐오합니다. 인간의 본성자체를 혐오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과 엮여 사는 전제조건으로 이런 것들을 서로 억제하고 살자고 ‘도덕’으로 약속은 하였지만 이것은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선 치솟는 광기나 무너지는 우울함이 우릴 패대기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거 정상입니다. 혐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혐오하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욕심 부리지 마세요.

산란심(散亂心) 수마(睡魔) 무기(無記).. 그리고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내외명철(內外明徹) 돈오(頓悟).. 무아(無我).. 용맹정진(勇猛精進) 천일기도(千日祈禱)..

이런 부자연스럽고, 진위가 의심스런 수행은 우리들 몫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시도하지만 다들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 채, 또아리 틀고 버티기에만 익숙해 지다가 슬그머니 그만둡니다. 그리곤 폼만 잡습니다. 주변에 가짜 도사들 얼마나 많습니까?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 여유가 있거나, 책임질 게 하나도 없는 분이 아니라면 아예 이런 건 시작할 궁리도 하지 마세요.


우리가 가야할 길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처럼 예수님을 통해 가는 길도 있고.
산사스님처럼 부처님을 통해 가기도 하고.
카사노바처럼 여자들을 통해 가기도 하고.
이병철 정주영처럼 기업을 세워서 가기도 하고.
열거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모두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인간의 괴로움의 근원을 아시고 그것을 극복하시고 대중에게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한평생 그것을 사람들을 알리는 데에 헌신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혼자서 무릎 탁치며 느끼신 그 애매모호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 대중에게 헌신하신 이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깨달음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기도하는 순간이 아니라 평생 대중에게 봉사하신 그 행위입니다.

솔직히 부처님 예수님 이 두분, 시대를 잘 타고났으니 지금의 이 반열에 올라있는 것이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면 그저 현명하던 사람으로 그쳤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은 최초 일등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의 깨달음이 특별하다는 게 아닐 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설사 부처님이라 하실지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그런 완벽한 분이 아니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사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에게 무엇이 더 덧씌워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린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체, 그러려니.. 하는 거지요. 부처님이나 예수님께서도 이럴실진대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대의 현자들은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마.. 마음 흘러가는 곳을 잘 보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잘 보고, 떄로는 연기도 아주 잘하고.. 이런 분들일 겁니다.

괜히 스님들 말씀대로 한답시고 억지로 비우려고, 버리려고 하지 마세요. 이거 암만 해봐야 되지도 않습니다. 이런거 다 비웠다고 자신있게 얘기하는 스님 본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안 비워집니다. 식물인간이 되기전에는 절대로 안 비워집니다. 부처님도 못 비우셨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목표로 하여야 하는 수행과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그저 우리 마음 모난 곳을 뭉개뜨리는 '연습과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수행의 목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즉 마음의 쪼인타 단련과정입니다. 그것도 완성은 없습니다. 그저 '과정'입니다.

자연이 어떤 질서로 돌아가는지 잘 살펴보고 그리곤 그렇게 자연에 맞게 내 몸을 맞추어나가는 연습을 합시다. 그러면 상대방도 보이고, 얼마 후면 나와 상대방이 같이 보이고, 결국에는 세상과 우리가 같이 보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화가 나더라도 상대가 이해되면 조금 덜 날 것이고, 욕심이 나더라도 힘들어 하는 상대가 보이면 욕심을 조금 덜 낼 것이고.. 이렇게 될 겁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어떻게 합니까? 화를 내면 됩니다. 화 안 내려고 한다고 화가 안 납니까?]

부처님도 화 내셨을 거고 걱정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덜 하셨습니다. 이치를 아시고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화나게 합니다. 제일 먼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만 입장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화는 이 단계에서 풀립니다.

[그래도 안 풀리면? 그냥 화를 내시라니까요. 괜히 억지로 참으면 병납니다.]

우리는 참 걱정을 많이 하면서 삽니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 해도 걱정은 좀체로 없어지지 않습니다.'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별거 아닌데도 유난히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좀 도움이 되지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전체의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걱정거리란 얘깁니다.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얘기죠. 그러면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걸 조금은 알고 걱정을 덜하게 되겠죠.

[그러나 그래도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냥 걱정하라니까요. 걱정없으면 그게 사람입니까? 짐승이지.]


그러나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알면서 적절히 화도 줄이고 걱정도 줄이며, 때로는 화도 내며 걱정도 하면서 살 잘고 있는데도 가끔은 세상이 날 참지 못하게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이 날 괴롭게 할 때에는 정말 답답하지요. 나의 수행만으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걸 인식했다면 그때부터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하면 됩니다. 이것이 다음 단계의 수행이고 깨달음입니다. 스스로의 수행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우리가 밖으로 나서서 풀어야 합니다.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사명이고 이것이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구원 받거나, 혼자 해탈하거나.. 이런 건 대중을 죽이는 '마약'입니다.
개인을 일깨우고 대중을 일깨우고, 사회를 맑게 하고 세상을 밝게 하고, 환경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전깃불 없는 시골에서 사시는 전우익 할아버지에게 방송국 남자가 물었습니다.
‘전기불 없이 깜깜하게 지내시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밤이란 게 원래 깜깜해야지’

자연의 질서를 아는, 살아있는 자연의 지혜입니다.
자 이제.. 깨달음 혹은 수행이라는 무거운 단어들을 놓아버리세요.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