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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쓰지 말고

산사에 계시는 그 분을 지금 내 자리에 옮겨 놓아 보세요. 그분은 얼마 가지 않아 내 자리를 못 견뎌 냉큼 다시 들어 가버리실 겁니다. 물론 ‘그럴듯한’ 말씀이야 남기시겠지요. 못견뎌서 도망간다고 하시겠습니까? 쪽팔리잖아요. 스님체면에.

이렇게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시는 스님이라면 그분은 그래도 참 용감하고 솔직한 분입니다. 대다수 스님들은 아예 첨부터 나오질 않습니다. 수행기간 꽁짜밥을 먹었으니 수행이 끝나면 그걸 갚으러 내려오는 것이 보답일 것 같은데.. 그거 잘 안 합니다.


산속에서 단련한 가짜 쬬인타와 세상에서 까이는 진짜 쬬인타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큰 테두리에서 보면 결국 같은 것이긴 하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분명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산사에서 처절한 자기절제의 용맹정진도 고행이지만, 세상을 피하지 않고 세상속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산사의 수행보다 훨씬 더 큰 고행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산사 수행승들을 과대평가하여 그들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고 그 분들을 존경하다가 급기야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 그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멀리 있는 그 청정무구한 지혜에 대한 갈구가 내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산사에서의 깨달음입니다. 세상에서는 그와 똑 같은 청정무구한 지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만 우리는 그걸 망각합니다. 잡히지 않는 지혜에 대한 그 갈구가 집착을 야기시킵니다.

‘내려놓을 게 가뿐한’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내려놓을 게 태산인’ 내가 따라 하려하니 안되는게 당연한데, 우린 안 되는 것에 대해 집착을 짓습니다.

안되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분들 말씀 따라 내려놓다간 가정이 절딴나고 직장이 절딴날지도 모릅니다. 산사로 들어갈 수 있는 팔자가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금을 그어야 합니다. ‘내려놓아야지, 깨어있어야지..’ 이것이 집착이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리석은 지혜와 집착은 도리어 업을 쌓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분들이 진짜로 내려놓은 건지 오랜 연습으로 ‘말하는 기술’을 습득한 건지는 잘 모릅니다.)


2. 집착은 때에 따라서 무서운 강박관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모르는 걸 이야기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마음이 깊어지고 그에 따라 강박관념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집착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그래도 불교공부를 꽤 했다는 사람일텐데, ‘나는 사실 조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사람들한테 폼을 워낙 많이 잡았거든요. 그래서 맨날 이렇게 썰만 풀게 아니라 진짜 지혜를 얻긴 얻어야겠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지혜에 대한 갈구가 집착에서 강박관념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면 더 괴롭습니다. 집착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강박관념까지 덧씌워지니 숨이 막힙니다.


3.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내 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도취하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이 이만큼 깊숙히 자리하고 들어 앉게 됩니다. 사회적 잣대로 본다면 집착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이 교만입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교만’과 ‘권위’를 구분하지 못하기 시작합니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보다 잘난게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대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고민과 갈등은 풀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의 고민과 갈등은 다 쉬워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내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의 티끌만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거지요. 이거 예수님 말씀 맞나요? 내가 저들보다 영적으로 깨어있다고 착각합니다. 난 늘 그래야 한다고 자기 암시를 계속 겁니다. 점점 더 교만해집니다.


4. 나는 더더욱 괴로워지기만 합니다. 言心一致가 안되는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교만과 집착과 강박관념을 넘어 그 위에 좌절이란 놈이 하나 더 얹혀집니다. 끝없는 집착과 강박관념으로 더 좋은 말씀들을 찾아 헤매게 되고, 또 다른 스승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고, 그런 스승은 없고, 그런 길도 없습니다. 계속 좌절합니다. 나에게 좌절하고 구도의 길에 좌절합니다. 애당초 시작부터 길을 잘 못 들었는데 뭔들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적당한 선을 그을 때를 놓쳐버린 사람들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며 점점 괴로워합니다. 이거 길을 잘 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지혜를 찾아 몸부림치는 것인데 갈수록 괴로움만 깊어지다니요.



지금 세상에서 골프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누굽니까? 타이거 우즈입니다.
우즈에게는 코치가 있습니다. 코치가 선수보다 더 잘합니까? 아닙니다. 실전 골프실력으로 본다면 우즈에 한참 뒤집니다. 그래도 코치입니다. 부치하먼입니다. 경기에 지나치게 열중하다가 스윙이 무너지고 마음이 흔들릴 때 그를 잡아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산사의 수행승은 부치하먼과 같은 코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는 속세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고 또 그것을 초월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승은 대부분 속세에서의 경험이 일천합니다.나보다도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 수행승은 그저 친구일 뿐입니다. 코치도 아닐뿐더러 스승도 아니고, 숭배의 대상이거나 존경의 대상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깊이 빠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줌마들입니다. 이 분들은 쉽게 어떤 대상을 ‘스승님’ 삼아 추종하고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본인들도 모르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닌 스님과 목사님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 수행? 깨달음? 1 – 그게 뭔데?
→ 수행? 깨달음? 2 – 도대체 뭘 깨달아?
→ 수행? 깨달음? 3 – 괴로워서 출가했을 뿐
→ 수행? 깨달음? 4 – 무아의 경지?
→ 수행? 깨달음? 5 – 수행자를 왜 존경?
→ 수행? 깨달음? 6 – 괜히 헛심 쓰지 말고
→ 수행? 깨달음? 7 –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