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내가 다니던 이발소의 이발사가 가위 자랑을 했다. ‘이번에 좋은 가위를 하나 샀습니다.’ ‘그런 건 얼마예요?’ 대수롭지 않게 물어봤다. 십여년전이었는데 물경 '백오십만원' 줬댄다. 깜짝 놀랐다. 가위 하나에 백오십만원? 이넘 미친넘 아닐까..
당구에 빠져있던 시절, 유난히 까다롭게 큐대를 고르는 넘들이 있었다. ‘명필이 붓 가리냐? 암꺼나 골라서 빨리 와 새꺄’ 그넘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물 이백 새끼가 큐대 중요한 걸 어찌 알리오’
우리들은 흔히 기구에 까다롭게 구는 이들에게 ‘명필이 붓 가리냐?’고 비아냥댄다. 실력이 출중해 봐라 도구가 뭐가 문제겠냐.. 마초들이 흔히 쓰는 이 말의 원래 한자말은 ‘能書不擇筆’ 일 것이다. 그 ‘能書不擇筆’에 하나같이 뜻이 달려 있기를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이지만 과연 이 해석이 맞을까? 한문을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그런 뉘앙스는 아닌 것 같다. 그저 ‘붓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글을 잘 쓴다’ 혹은 ‘글을 잘 쓰지만 붓을 가리지 않는다’ 이다.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이 말의 원전을 唐書의 ‘구양순전’ 이라고들 소개를 한다. 구양순은 당나라때 명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앞뒤의 말을 같이 발췌하여 설명한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양순不擇筆紙能書’ 만 있었다. 즉, 구양순의 뛰어났던 실력을 기술하는 ‘그는 종이와 붓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 가 원문이 되겠다. (아마 그 당시에는 종이와 붓의 질이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다른 서예가들은 그걸 많이 따졌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암만 찾아봐도 실제 '구양순전'에 能書不擇筆 라는 글귀가 있다는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능서불택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 더 찾아보니 이 말은 다른 책에서 나왔다. 王肯堂筆塵과 論書라는 책에 이런 서술이 있다고 한다.
‘[能書不擇筆] 이라고 한다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제삼게 되었다.’ ‘[能書不擇筆]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와 초서를 제외한 해서, 전서, 예서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알고보니 ‘능서불택필’이라는 말은 원래 없던 말이며, 그저 ‘구양순불택필지능서’라는 단순한 서술이 인구에 회자되면서 재탄생한 ‘속설’이었으며, 후대에 [그 속설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하며 그 말을 인용했던 것뿐이었다.
즉, [‘명필이 붓을 안 가린다’라지만 사실은 붓을 가린다..] 가 원전 되겠다.
그런걸 가지고 사람들은 이 성어를 생성 원뜻과는 정반대로 이 말을 멋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 붓과 종이를 가리는 사람은 아직 서예의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라고 방정을 떠는 것이다.
비슷한 영어문구도 갖다 댄다. ‘A bad workman blames his tools.’ 게다가 어느 바이올린 연주자의 일화까지 들이대면 우리는 할말이 없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가진 그의 연주가 뛰어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워낙 명기인 바이올린의 역할도 크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날 연주를 하고 나서 열광하는 관중 앞에서 방금 연주했던 바이올린을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놀라는 관중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그저 싸구려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깊이 좀 해보자. 能書不擇筆이 설사 맞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과연 이것일까? 적어도 '붓과 종이를 가리는 사람은 아직 서예의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단순한 뜻은 아닐 것이다. 이 能書不擇筆의 진정한 뜻은 도구를 유난히 가리는 사람을 탓하려는 것일 것이다. 즉, ‘자신감이 없으면 핑계거리를 찾는 법이니 그걸 경계하라’는 말이다.
각설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어떨까? 명필들은 붓을 가릴까 아니면 진짜 가리지 않을까?
실제로 명필들은 심하게 붓을 가린다.
타이거 우즈는 지금 내가 쓰는 클럽을 가지고도 가뿐하게 이븐파나 로우싱글을 기록할 것이다. 페더러는 내 라켓과 바꿔 잡고서도 단 한번의 리턴도 허용하지 않고 단 10분 안에 3세트 승리할 것이다. 마이어는 오래된 내 스키를 신고서도 새처럼 코스를 활강하며 내려올 것이다. 그렇다. ‘명필들이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 말이 이런 경우엔 그런대로 맞는다.
그러나 타이거우즈가 PGA에서 우승하고자 할 때에도 내 골프채를 들고 나가려 할까? 페더러가 나달과 붙어 이기고자 하면서도 내 라켓을 쓸까? 마이어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자 하면서도 내 스키를 들고 나갈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명기'를 들고 나갈 것이다. 왜 그들은 중요한 순간에 명기를 찾을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최선의 결과가 필요하지 않을 때] 까지만 맞는 말이다.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 할 때는 명필일수록 붓을 가리게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병적으로 까다롭게 붓을 가린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비슷한 경지 근처에도 올라보질 않아서 붓이 중요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라이버 바꿨다고 실제로 비거리가 늘어나거나, 아이언 바꿨다고 백스핀이 잘 먹거나, 퍼터 바꿨다고 퍼팅의 정교함이 진짜 향상되는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나도 말은 그렇게 했었다. ‘역시 빠따 바꾸길 잘했어’ 남들이 다 그러니까)
그러나 이번에 하이엔드 기타를 갖게 되면서 처음으로 '붓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명필이라는 뜻이 아니라.. 명필이 아니더라도 붓에 따라 엄청나게 글씨가 달라진다는 걸 경험한 것이다. 명필들이 왜 그렇게 붓에 까다로운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能書不擇筆은 아마추어들에게만 맞는 말이었다.
프로들에겐 맞는 말은 不能名書不擇適筆이다.
→ 기타 고르기 1 – 어렵다
→ 기타 고르기 1.5 – 명필일수록 붓을 가린다
→ 기타 고르기 2 – 비싼 기타가 좋은 기타
→ 기타 고르기 3 – 마틴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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