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언론권력 3 - 기자는 소설을 쓴다

내가 왜 신문을 찌라시라고 부르고 기자를 도둑놈이라고 하는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듯 모든 것이 들쑤셔지고 있었지만 ‘사건’의 실체와 진실은 아직 오리무중인 채 갖은 추측만이 난무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사건의 핵심도 아니면서 졸지에 그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저 실무부서장중의 하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오해를 받았다. 약삭빠른 그의 직속상관 두명은 이미 해외로 도피한 이후였고 해당실무부서의 간부로는 유일하게 그만이 그냥 한국에 남아 있었다. 그 세명을 언론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핵심 삼인방’이라고 불렀었다.


바람이 상당히 차갑던 어느 날 저녁 그와 만났다. 아파트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감금되다시피 있었을 그에게 바람도 쐬게 할겸, 마음고생이 심할 그의 기분도 풀어줄 겸.

자타가 공인하던 바른생활 사나이였던 그가 웬일로 그날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한다.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과 걱정스레 바라보는 가족들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어서였을까..
오랜만에 자기고향에도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럼 일단 어디가서 눈 좀 붙이고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사람의 눈에 띄는 여관이나 호텔은 가기 싫다고 한다. 그래서 방바닥이 아주 따뜻한 어떤 회사의 숙직실로 갔다. 추운 겨울날,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돌방 분위기.. 금세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가 문득 해외로 도피한 그의 직속상관들을 궁금해했다. 그들과 바로 연결이 되었다.
전화 속 그들의 말은 몹시 긴박했다.
‘괜히 봉변당하지 말고 당신도 내일 당장 이곳으로 와라. 일단 큰 비는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피합니까? 피하면 오히려 괜히 더 의심받을 거 아니겠습니까?’


다음날.. 평일 늦은 오전의 고속도로는 참 한가했다.
지난번 티샷은 참 멋졌었다. 근데 아이언샷이 아직도 방향성이 없더라.. 옛날 그때 그 여자가 여자친구 아니었수? 다음 휴게소에 부페레스토랑이 있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자.. 내 고향에 가면 계곡이 있는데 경치가 죽여주니 이번에 거기도 한번 가보자.. 지난번 같이 나갔었던 골프이야기, 옛날의 시시콜콜 이야기를 끄집어 내며 자동차 여행은 즐거웠다.

부페식당이 있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자동차에서 내리는데 그가 안경을 벗는다. 혹시라도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서 그런댄다. 뉴스에 얼굴이 몇번 나왔었대나.. 참 별 걱정을 다하슈.. 그는 그렇게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놀멘놀멘 길을 가니 저녁이 다 되어서야 그의 고향에 도착했다. 시골마을 허름한 식당에 이른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식당 안에 혼자 켜져 있던 TV에서 뉴스가 시작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뉴스에 시선을 박고 귀를 기울이는데.

‘사건의 핵심 삼인방 모두 도피, 잠적’
‘두 사람은 해외로 도피한 것이 이미 확인 되었고 나머지 한사람은 국내로 도피 잠적한 듯’

둔기로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듯 멍해졌다.
어제 하루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인데 도피, 잠적했다는 기사가 TV 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도피자 사진이라며 얼굴까지 화면에 크게 잡히는데 범죄자 취급 한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랐던 그가 애써 진정을 하고, 식사도 그만두고 그는 또다시 슬그머니 안경을 벗고 외투 깃을 올리고 먼저 식당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죄 짓고 도주한 범죄자 취급을 받다니.. 평소 지나치리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던 그도 그때엔 흥분을 가라 앉히기 어려운 듯 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
의논하거나 행동지침을 내려줄 직속상관 아무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다.

기이한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머리만 싸매고 있었다. ‘검찰로 그냥 가야 하나.. 아니면 일단 피하고 추이를 살펴봐야 하나.. ’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건의 전모, 사건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으니 해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사건의 실체는 그렇다 치고 진행의 추이라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야 가닥이라도 잡겠건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나의 직장후배 하나를 떠올렸다. 언론계와 정치판의 사정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그도 즉답은 하지 못하고 진행상황을 알고 있을 주변 사람들과 의논을 해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그로부터 전화가 다시 왔다.

‘아직은 특별히 검찰의 움직임은 없는 것 같고, 어제 보도는 순전히 방송국의 추측보도였던 것 같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복잡하고 무시무시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 상황이 정 불편하시다면.. 잠적한 거 아니라는 것만 일단 밝히고 추이를 살펴보시지요. 믿을만한 기자를 한번 수배해 볼까요?’

그간 그에 대한 언론의 추측보도와 괴롭힘에 이골이 났던 그가 이 참에 자기는 아무런 티끌도 되지 못함을 깨끗하게 밝히고 싶었던지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잠시 후 후배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동아일보 정치부에 자기가 잘 아는 아주 믿을만한 후배기자가 있는데 그와 연결이 되었고 그가 확실하게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내일 시간을 잡도록 하시지요..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다음날, 영화속 도망자처럼 차 안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접어들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이 잘 될려고 눈이 내리나 보네.. 걱정하지 맙시다.’

약속장소엔 직장후배와 그 기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몇번이나 다짐을 받고 기자와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나는 ‘사건’의 본질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그걸 알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핵심 삼인방이니 하는 말은 가당치 않다. 해외로 나간 나머지 두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제는 그저 바람 쐬러 고향에 다녀왔을 뿐인데 잠적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다. 어이가 없다. 다만 이 사실만 간단하게 알려달라..’

기자는 사실대로 기사를 쓸 것을 다짐 했고 굳게 악수를 하고, 그리고 헤어졌다.



다음날 이른 새벽,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격앙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침 동아일보 봤냐고. 제 1면 헤드라인.

‘[사건], 정치음모 있다. – 도피 중이던 xxx, 본지 단독 취재’

당사자가 전혀 모르는 정치음모설이 당사자가 직접 입을 열어 밝힌 듯 소상하게 기사화 되어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창작된 소설이었다. 사건의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정치음모로 꾸며져서 그 사건을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뒷통수를 또 한번 세게 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진짜로 이 표현대로 머리가 멍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이 커졌다. 할말을 잊었다. 기자를 소개했던 직장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이미 그도 기사를 보고 격분하여 벌써 동아일보 그 기자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
‘기자는 제대로 기사를 써서 넘겼는데 데스크에서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개새끼가… 아무튼 이거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곧바로 수포로 돌아갔다.
모든 석간 신문들도 동아일보가 아침에 특종으로 올린 이 정치음모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음모의 실체가 어떻고, 사건의 핵심에는 누가 연루되어 있고..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다음날은 더했다. 그 사건에 관련된 정치음모가 온 신문을 뒤덮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국민일보는 한술 더 떴다. ‘도피중이던 xxx, 고향 oo에서 본지와 단독 인터뷰’

한번 얼굴을 보지도 못한 국민일보 기자 하나가 고향에서 단독 인터뷰를 했다고 특종기사를 또 올렸다. 동아일보가 인터뷰를 했다는 날짜와 겹치든 아니든 상관도 하지 않았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자기들이 지어내고 퍼뜨리던 온갖‘추측’들을, 자기들이 지어낸 ‘가공의 핵심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확인된 ‘실제상황’으로 반전시키고 있었다.

아.. 철저하게 이용당했구나.
음모설을 사실로 터뜨릴 반전기회와 그 분출구를 눈 뒤집고 찾던 언론들이, 제발로 걸어 들어온, 순진하기 짝이 없었던 한 사람의 입을 강제로 뺏어서 이렇게 지어내는 거구나. 그 사람이 죽든 말든 이렇게 처절하게 그 사람의 입을 찢고 생매장을 시켜버리는구나..

이후 여론은 급격하게 ‘정치 음모’쪽으로 쏠려갔고 정국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경제사건이 핵폭탄급 정치사건으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사건의 핵심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추악한 정치싸움의 소용돌이에 정국은 휩쓸려 들어갔다.



그 당시,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대검 중수부 수사실에서 몇날 몇일을 심문을 당해야만 했었다.
조직의 윗사람들로부터 ‘상황판단도 할 줄 모르는 병신’이라고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네 병신 짓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다’는 가슴 메어지는 욕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언론의 음모작당에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그들 작당의 소모품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희생양은, 그를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린 추악한 언론을 징벌할 기회가 없었다. 아니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조차 없었다. 미친듯이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우리나라엔, 과연 민주주의 법치국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언론의 횡포에 이렇게 사람이 다쳤는데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길조차 없다니. 허탈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됐다. 인제 그만 할란다.'

그렇게 그는 한 많던 서울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
이름까지 바꾸고 지금껏 조용히 살고있다.


→ 언론권력 1 – 스타킹에 오줌물 튀긴 죄
→ 언론권력 2 – 권언유착
→ 언론권력 3 – 기자는 소설가다
→ 언론권력 4 – 이승복 진실게임
→ 언론권력 5 – 박정희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