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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언론권력 5 - 박정희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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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 계속하기가 한동안 망설여졌는데 일단 마무리는 하겠습니다. 통큰 구월생.)

우리가 가장 쉽게 느끼는 권력은 돈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할 만큼 현대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전 국민의 99.99%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우리는 가끔 티비에서 정치인들을 보면서 어렴풋이나마 정치권력을 짐작한다. 실제로 정치권력이 어떤 힘을 행사하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왜 돈 많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기업인들이 더러운 정치인들에게 돈을 몰래 갖다 바치는지.. 잘 모른다.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교섭으로 티비에 얼굴을 비치면서 얼굴을 알린 다음, 계획된 수순에 따라 정치권에 진입하여 신선한 이미지를 형성시키고, 또 치밀한 계산 하에, 당선이 100% 보장된 국회의원을 ‘공개적으로 마다’하여 박수를 유도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구축한 다음, 몇 년간 더욱 ‘우아하게 이미지를 관리’해 오다가 느닷없이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정치판에 화려하게 복귀쇼를 하는 십여년간의 장기적이고 치밀한 전략]을 보면서 그 정치권력의 마력을 짐작 할 수는 있겠다.


정권과 돈. 일반사람에겐 그림의 떡이요 안방마님 속살이지만 대단한 것인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그러나 철권통치 정치권력은 그동안의 민주화 과정 동안 많이 약화되었고, 황제폐하 경제권력도 외환위기 이후의 재벌개혁에 의해서 많이 약화되었다. 이제는 박통이나 전통 같은 철권 통치자나 삼김씨 같은 제왕적 정치지도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며 왕회장의 ‘감이나 직관’에 의해서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기업도 이제 별로 없어 보인다.

비록 아직까지는 후진적인 정치권력이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 정치권력이 이제 국가 전체를 썩게 하거나 좀먹지는 않는다. 한국의 경제권력들이 비록 투명하지 않은 세습경영이나 정경유착으로 욕을 먹고는 있지만 이것이 국가경제 전체를 말아먹을 암적인 요소는 아니며 이들 경제권력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임도 부인 할 수는 없다.

또한 남아있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어두운 면들도 머지않은 장래에 개선될 것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 권력들에 대해서는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모두에게 형성되어 있고 또 이들을 견제, 감시할 수 있는 많은 제도적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치는 또 하나의 거대하고 위험한 권력이다.
바로 대한민국 최상의 권력, 언론권력이다.

현대사회에는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또 다른 권력이 발전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권력이다. 언론은 이렇게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비판하며 정치민주화와 경제 투명화를 이끌어내는데 일조를 하였지만 정작 언론권력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판받은 적이 없었다. 통제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질주의 권력기관이다. 지구상에 존재 했던 어떤 절대 정권도, 어떤 종교도 오늘날 한국 언론이 누리는 절대 권력을 가져 본 바가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은 이미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서 언론권력으로 이동한지 오래이다.

언론은 현대국가의 거의 모든 사람을 통제된 이미지와 단어로 포위할 수 있고, 세뇌할 수 있고, 국가의 정치적 의제까지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어떤 사안이라도 막강한 언론권력이 규정하면 그렇게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종교, 학교, 부모 심지어 정부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언론은 이렇게 사회 위에 ‘군림’해 있다.

언론 본연의 임무는 무엇일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의 전달’이다. 그냥 사실만 전달하면 된다. 그러나 언론은 스스로를 ‘제4부’ ‘감시견’ ‘사회의 목탁’ 등으로 부르며 사회적, 역사적 사명을 스스로 부여했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작금의 사명도 스스로 부여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역할을 수행하겠다던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국민들이 자기들과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의 무시무시한 사회장악력, 여론 장악력으로 무력화시켜 버린다. 그들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언론은 사회 곳곳에 시기와 질투, 분노와 투쟁을 부추겨 그 폭발력을 동력으로 쓴다. 언론은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린다. 이들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내팽개치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작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을 검증하기는커녕 인용보도와 사설을 통해 확대 재생산하는 데 바쁘다.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갈등을 부추길까? 간단하다. 갈등이 없는 곳에서는 언론이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만 하며 그 막대한 권력을 잃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에겐 ‘물갈이’의 기회가 있다. 선거다. 그러나 언론은 이 세상 모든 권력을 초월해 있어 변화를 모른다. 세뇌된 교인이 악질교주를 처단하지 못하듯, 언론에 의해 교육받고 성장한 국민들은 그 언론의 잘못을 모른다. 언론에 세뇌당한 국민들은 언론을 바꿔야 할 필요성 조차를 느끼지 못한다.

한국의 언론은 스스로를 신성불가침의 영역 안에 설정해 놓았다. 언론에 시비를 거는 일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과 같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리는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행태, 그 대표 집단이 언론권력이다.

이 언론에게 제자리를 알려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 경제, 국제관계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언론 개혁을 먼저 이루어 내지 못하면 구태정치 타파, 지역통합, 재벌개혁 등 그 어떤 것도 공염불이 되고 만다. 이들이 자신과 대변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반대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혹은 시대착오적인 이념을 고수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선전공작, 방해공작을 할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언론권력엔 제도적인 견제장치도, 감시단체도 별로 없다. 언론사 세무조사 때마다 우리가 익히 보았듯이 언론은 자신들에 대한 국가의 정당한 조세권 발동도, 국민들의 알 권리도, 그리고 시민단체의 감시와 견제도 전부 ‘언론자유 침해’로 규정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려는 정권은 언론을 탄압하는 압제정권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선동한다. 이런 가운데에 도미노현상을 차단하려는 다른 언론권력은 느닷없이 언론의 자유를 외쳐대며 여론을 다른 쪽으로 호도한다. 언론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대체언론들도 상호 비판을 금기시하는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을 내세워 침묵한다.

언론외에는 사실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는 국민들은 이런 언론들의 합동작전에 까막눈, 귀머거리가 된다. 그래서 언론개혁은 성공한 적이 없다.


권력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갖게 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즉 권력은 ‘빼앗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빼앗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다른 이념’을 가지고 환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 언론권력 1 – 스타킹에 오줌물 튀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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