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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김용철.. 배신이 아니라 희망이다

조직과 보스의 일 때문에 대검 중수부에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묻는 모든 것에 모른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기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역시 그들이 묻는 모든 것에 모른다고 대답했다. 알고 있던 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알고 있는 것이 있었더라도 나는 모른다고 할 요량이었다. 물론 기자들에게 함구했던 것은 동아일보 문화일보 사건 이후 모든 기자들을 쓰레기라고 규정지었었기 때문이었지만, 중수부에서까지 입을 다물기로 작정했던 것은 오로지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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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보스가 '공공의 적' 혹은'사회악'이라는 것을 전제로 네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경우 1) 
난 조직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 누구를 막론하고 고민이나 갈등 없이 입을 굳게 다문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회정의 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며, 사회정의가 내 이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면 그 사회정의를 무참히 짓밟는다. 고민이나 갈등자체가 아예 없다.

(경우 2) 
난 조직에서 평범한 대우를 받거나 도태당하는 중이다.

-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조직과 보스가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침묵한다.

(경우 3) 
난 조직에서 이미 이탈했다. 하지만 조직과 보스에 극악한 감정은 없다.

- 사회정의 구현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몸담았던 조직과 보스를 굳이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배신자라는 소리는 듣기 싫다. 약간의 고민과 갈등이 있지만 침묵한다.

(경우 4)
난 ‘조직과 보스에 감정이 상한 상태’로 조직에서 이탈되어 있다. 더러운 꼴을 당하고 짤렸다.

- ‘사회정의 구현’과 ‘개인적 복수’를 한꺼번에 다 하고 싶다. 즉 조직과 보스도 엿먹이고 사회정의도 구현하고 싶다. 그러나 쉽지 않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무섭기 때문이다. 침묵한다.


누구에게나 사회정의보다는 개인적 이득이 우선이다. 개인적인 이득이 없는 경우 사람들은 사회정의라는 명제앞에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조건이 있다.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이유를 들이대어도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고발하지 않는다. 배신을 함으로써 내게 오는 개인적 이득이 막대한 경우가 있다면 그리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신자라는 낙인을 더 무서워한다. 자기가 속한, 혹은 속했던 조직의 비리를 알리는 내부고발이 그래서 어렵다. 내부 고발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구현’과 ‘배신자 낙인’은 동전의 양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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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두명의 배신자 겸 내부고발자로 떠들썩하다. 김미미라는 여자와 김용철이라는 남자. 김미미라는 여자는 친구를 배신했고, 김용철이라는 남자는 삼성을 배신했다고 한다.

옥소리의 오랜 친구였지만 옥소리와 몇달전 절교하고 무슨 앙심이 남아있었는지 전국민에게 ‘옥소리 확실히 걸레 맞음’ 이라고 고발했던 김미미라는 여자. 이십년동안 톱스타였던 친구에게서 받았을 설움과 자격지심,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상황같은 걸 따져볼 생각은 없다. 그냥 소름끼치게 무서운 년이다.


삼성을 고발한 김용철.
그가 비록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그는 삼성에서 벌어먹고 살다가 퇴직한 사람이다. 내게 이익이 될때는 조직의 비리에 눈을 감고 사회정의를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조직이 날 버려 더 이상 빨아먹을 단물이 없자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조직을 고발했다. 그가 삼성에서 아주 잘 나가던 때에 이 일을 했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의인이다. 논란을 허락치 않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계약된 돈을 다 받고 나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배신자라는 소릴 듣는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자. 내부고발자를 영원히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기어이 매장시켜 버리는 우리나라의 문화, 내부고발자는 영원히 사회에서 왕따시켜 버리는 문화가 과연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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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개인적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개인의 이해득실 앞에 사회정의 구현이니 개인적 친분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만 판단한다. 국가의 민족이라는 거룩한 명제가 있을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을 택했다. 친일파를 가려낸다고 혈안이지만 당시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였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국가와 민족에서도 그럴진대 월급을 받기 위해 다니던 기업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나가다가 편안하게 정년퇴임을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중간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타의로 직장을 그만 둔 사람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내게 어떻게 서운한 짓을 했든 자기가 속했던 회사에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김용철에게는 뭇매를 들이댄다. 개새끼 잘 나갈땐 닥치고 있다가 쫓겨나니까 저 지랄을 해?


여기서 우리,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매일매일 허파가 폭발할 것 같고 눈알이 튀어 나갈 것 같은 부정과 부패와 비리를 보면서 산다. 생각만 해도 역겨움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하루하루를 산다. 대한민국의 샐러리맨들이 저녁시간 술잔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내 조직의 문제가 설령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숨막히는 구조적 모순은 제 정신으로 귀가하여 가족을 만나 잠을 청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혹자는 혁명을 꿈꾸고, 혹자는 자살을 택하고, 혹자는 이민을 감행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냥 산다’. 이 더러운 모순, 거대한 쓰레기더미들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걸 생각할 때 소름이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없는 소시민들은 그냥 산다. 그 쓰레기더미들과 맞설 상황도 못되고, 그럴 용기도 없지만, 설사 기회가 주어져도 그냥 입을 다문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배신자라고 찍히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패와 비리는 늘 시야 아래에 묻혀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에 덮여있다. 겉은 푸른 숲이지만 속은 쓰레기더미인 난지도가 바로 우리나라인지도 모른다. 정의가 실종되고 사기와 협잡만이 판을 치는 나라가 우리나라인지도 모른다.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그 방면에서 신선의 경지에 올라있다. 국민들은 그 사람이 되어야 제대로 먹고 살게 된다고 그를 지지하고 있다. 희망이 절벽이다. 천하고 추악한 명박형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릴게 뻔하다. 우리나라는 점점 더 속은 곪고 겉은 번지르르해질게 뻔하다.

그러나 지금은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썩어 문드러진 기득권이 스스로 자각하고 반성하길 기대할 게재가 아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절벽이다. 이런 때에 갑자기 김용철이 나타났다.


그렇다. 우린 이런 내부고발에 아직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다. 비록 작게는 배신이지만 크게는 사회변혁의 기폭제가 되는 중요한 단초가 되는 내부고발. 그렇다. 이거다.

반도체 잘 만들고 자동차 잘 만든다고 선진국이 아니다. 상식과 정의가 살아 있어야 선진국이다. 우린 지금 지금 반도체 잘 만들고 자동차 잘 만드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앞으로도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상식과 정의보다는 성장우선주의가 전 국민들에게 광기로 피를 튀기는 나라다. 그러나 나라의 그 어느 조직이나 단체도 이를 바로 잡으려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둥이뿐이다. 이럴때 민초들의 내부고발이 희망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내부고발.. 굉장히 어렵다.

우리가 만약 지금 김용철과 같은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자.

‘비겁한’ 우린 아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내게 쏟아지는 관심도 감내할 자신 없고, 배신자라 욕하는 그 비난을 감수할 자신도 없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그냥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말할거면 미리 말했어야지 지금은 너무 늦었어.. 사람들이 틀림없이 날 배신자라고 욕할텐데.. 내가 이런다고 사회는 바뀌지 않아.. 다만 배신자가 되지 않은 것에 자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배신은 나빠!.. 우린 틀림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용철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배신자를 자처하며 나섰다. 검사짓도 하고 삼성에서 변호사짓을 한 김용철이 자기가 이렇게 배신자로 비난받을 걸 예상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걸 감수하고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김용철보고 생선가게의 고양이라고 말한다. 삼성(생선)을 지키랬더니 되레 삼성을 힘들게 했다(생선을 먹었다)고. 그러나 생선가게의 고양이는 김용철이 아니다. 따로 있다. 부패와 비리를 척결하라고 헌법이 힘을 준 ‘사법부’가 바로 생선가게 고양이다. 당연히 몽둥이로 때려잡아 뼈와 살을 분리해 태워버려야 하는데, 이 고양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서 맞아 죽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생선가게의 또 다른 고양이가 그걸 막고 있기 때문이다. 더 힘세고 더 못된 고양이, ‘언론’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으로 입으로 열심히 알리려 노력을 한다. 삼성을 망하게 하자는 게 아닙니다.. 뿌리깊은 부패사슬을 이번 기회에 끊자는 것입니다..그래. 잘만 하면 김용철의 이번 내부고발이 고질적인 부패사슬을 단절하는, 우리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근데 현실은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냥.. 유야무야 묻힐 것 같다.

그 생선가게의 고양이는.. 띠바 그 두마리가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생선가게에는 생선을 훔쳐먹는 고양이가 우글우글 천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 많은 김용철이 필요하다. 첫 김용철에게 격려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또 다른 김용철들이 이곳저곳에서 봇물처럼 터져야 우리나라가 바로 설 것 같다. 대선후보 진영에서도 나오고, 청와대에서도 나오고, 검찰에서도 나오고, 신문사 방송사에서도 나오고..

그래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