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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이민생활의 단계

환상
여행이나 출장으로 잠시 들렀던 외국.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거리, 미사리 까페촌에서나 본듯한 예쁜 집들, 친절했던 사람들.. 착각을 한다. 이곳에서 살게 되면 나도 저들의 일부가 되어 멋지게 살 것으로. 아침이면 넓은 정원이 보이는 발코니에서 우아하게 모닝커피를 마시고, 주말이면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길 것으로 착각을 한다. 무지개 넘어 그 어딘가에 환상을 심었다.


꿈의 나라로 떠난다
조국이 상처를 줬거나, 조국이 실망을 줬거나, 조국의 현실이 답답했거나, 더는 버틸 수 없는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환상에 품어왔던 꿈의 나라가 떠오른다. 그래 떠나자.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입고, 잘 생긴 머스매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로 떠나자. 혹자는 금발의 미녀를 꿈꾸기도 한다.

백약이 무효한 불치병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도 이 무모한 도전을 막을 수는 없다. 바다 건너 이 세상 어딘가에 분홍빛 꿈나라가 있음을 확신한다. 모든 추억과 그리움과 아쉬움과 익숙함들을 뒤로 한 채 한국을 떠난다.

꿈에도 그리던 땅, 이제 지긋지긋하던 한국생활은 인생에 더 이상은 없다. 하루하루가 가슴 벅찬 나날이다. 이 땅에선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왜 더 일찍 여기에 오지 못했었을까 그걸 아쉬워하는 나날이다. 사람들이 생소해도 즐겁고, 생활이 생소해도 즐겁고, 풍경이 생소해도 즐겁다. 왜냐하면 지금 미국에 있으니까. 넓디 넓은 미국땅, 그래 바로 여기다. 아메리칸 드림이 기다리는 곳. 


아- 띠바 괜히 왔나부다
정체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 걸음이다. 이젠 뭔가 보여야 할 때인 거같은데 아직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이제서야 현실을 본다. 지도도 없이 용돈도 한푼 없이 외지에 내 팽겨친 듯한 두려움과 적막감이 솟는다.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일단 움직이자 움직이자.

그러나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 막고 움직일 줄을 모른다. 미국서 살면 저절로 영어가 되는 줄 알았더니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를 외우면 두개를 까먹는다. 결국 생활반경이 한인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저분한 한인타운에서 한국인들과 바글바글 거리며 살자고 내가 미국엘 왔나?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줄어드는 은행의 잔고는 이런 고민을 그리 오래하게 놔두지 않는다. 먹고 사는 방법을 찾는게 급선무다.

영어를 못하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무가내 장사와 육체노동밖에는 없다. 미국엔 직업의 귀천이 없대잖아.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뭐가 어때. 그러나 이 호기가 무너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이짓 하려고 미국엘 왔나.. 근데 현실은 이짓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미국생활의 분홍빛 꿈은 슬슬 잿빛으로 조각나기 시작한다. 넌 할수 있어 넌 할수 있어..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갈수록 힘이 든다. 그렇다고 돌아가기엔 너무 쪽팔린다.


미국에 갇혔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이렇게 힘이 들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미국인으로 여유롭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다투느라 잃어버린 것만 수두룩하다. 어려운 시절엔 서로 독과 악만 남는 것이든가.

남다른 각오로 시작했건만 심각한 회의에 휩싸여있다. 내가 기껏 이런 일이나 하려고.. 고작 이렇게 살려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떠났던가? 말수가 점점 적어지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가능하면 회피한다. '걔 미국가서 뭐한대?' 직접 들은 것도 아니건만 귓속에 쟁쟁하고 가슴이 철렁한다.

분홍빛 꿈나라? 이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음을 이제는 알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도, 되돌아 나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 갇혔다.


그래도 아직 거기에 있다
미국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그대로다. 외국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불편한 것도 여전하고, 영어가 답답한 것도 여전하다. 늘 가슴 허전한 것도 여전하고, 영원히 이방인인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새롭게 안 것도 많다. 미국에도 직업의 귀천이 분명히 있음을 알았고, 쓰디 쓴 인종 차별이 있음을 알았고, 이민 1세들에겐 절대 넘을 수 없는 한계들이 수두룩함을 알았다. 전에 가졌던 환상은 대부분이 그림의 떡이었임을 알았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미국이 점점 더 낯설어지는 이 죽일놈의 모순에 허우적댈수록,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메리칸 드림? 푸훗..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보면서 그나마 저들보다 경험을 먼저 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 웬일인지 이젠 그 악스럽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고국엔 이미 내 자리가, 내가 할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고집부리고 가더니 결국 다시 왔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미국의 한 거리에 남아있다.


포기를 한 것인가
세상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새 나이가 들어 세상이 보이는 건지, 이국땅에서 고생을 많이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 일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온 자기 인생도 객관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무엇을 잘했었고 무엇을 잘못했었는지 그게 이제서야 보인다. 그 이후엔, 이역만리 나와 산 이후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싸우지 않는 법을 배웠고, 포기하는 법을 배웠고, 목표를 그리 높게 세우지 않는 걸 배웠고, 쉽사리 흥분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작은 일에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웠고, 소홀했던 부분에 관심을 갖는 법도 배웠고, 소중한 것에 사랑을 쏟는 법도 배웠다.

이젠 미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나 보다. 비록 무슨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나 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여기 말고는 갈곳이 없다고 포기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끝 모를 타향살이
망할 놈의 그리움은 여전히 엷어지지 않는다. 어지간히 무디어질 때도 되었겠구만 그 그리움은 엷어질 줄을 모른다. 대상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고향에 대한 것인지, 가족에 대한것인지, 그저 과거에 대한 것인지. 늘 그리움에 젖어 산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그 불편함,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억지로 앉아있는 듯한 그 머쓱함도 여전하다. 이민 삼십년차도 불현듯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라는 생각을 한다더니 이제 그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 나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늙은 얼굴에 깜짝 놀란다. 그로부터 전해들은 친구들의 고단한 소식들에 가슴도 답답하다. ‘너 언제까지 미국에서 살거냐?’ 가슴이 철렁한다.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어떡해야 하나. 여기에서 살다가 여기에 그냥 묻혀야 하나, 아님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