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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LA 한인사회 - 마이클과 제임스로 사는 '익명의 섬'

한 아저씨.. 이름을 쓰는데 영어로 Jacksun Cho 라고 쓰고 옆에 한국말로 ‘조잭순’이라고 써놨다. ‘성함이 Jacksun 잭순이세요? 잭슨Jackson이 아니고?’ 잘못 쓴게 아니란다. 시민권 딸때 미국이름 ‘Jack’과 한국이름 ‘순’을 쓴건데 실수로 둘이 붙는 바람에 '잭순'이 된거란다. 친구들은 ‘작순’이라고 부른댄다. 물론 이 조잭순씨는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은 제임스 마이클 스티브다. 한인 이민 1세들의 이런 '영어'이름을 생각해 본다.


한국은 성이 흔하고 이름이 독특
한국엔 336개의 성씨가 있다는데 이중 ‘김이박최’ 네개의 성씨(1.2%)가 전체의 반이고, 그 뒤를 잇는 ‘정강조윤장임’ 6개의 성씨(1.8%)가 전체의 14%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곤 나머지 326개의 성씨(97%)를 다 합쳐야 전체의 36%에 불과하다. 전체인구의 65%를 3%의 성씨가 차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극심한 편중이다. 우리 주변사람중 반이 김이박최이다. 그래서 이렇게 흔한 성으로는 개인 분간이 힘들다. 그래서 이름들이 이상한 이름이 많다. 내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은 이름이 흔하고 성이 독특
하지만 미국은 반대다. 워낙 여러 민족들이 이민을 와서 만들어진 곳이라 미국엔 성(Last Name)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다. 아직도 매일매일 처음 들어보는 성을 만난다. 미국에서 가장 많다는 성 Smith와 Brown을 아직까지 직접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미국의 성씨는 다양하다. 그래서 웬만큼 큰 집단이 아니라면 성만 가지고서도 다 구분이 된다. 미국엔 그대신 이름(First Name)의 가짓수는 적어도 너무 적다.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남자 이름을 예로 들면 John(Jack), James(Jim/Jimmy), George, William(Will/Bill), Joseph(Joe), Richard(Dick/Rich), Michael(Mike), Robert(Rob/Bob), Charles(Charlie/Chuck), Edward(Eddie/Ted/Teddy), David(Dave) 이 미국남자 전체의 반 정도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래서 이름만 가지고서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드라마 제목에도 있다. Samantha Who? 그 사람의 성을 알기 전엔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는게 미국의 이름구조다.


한국 성 + 미국식 이름 = 흔해도 너무 흔한 한인들의 이름
이런 미국에 한국인이 왔다. 미국에 왔으니 우리도 미국이름을 써야 할까? 우리도 저 흔하디 흔한 미국이름중의 하나를 꿰차고 그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까? 한인들중 미국이름을 가진 남자 열명중 여덟명은 잔 제임스 마이클 스티브 브라이언 피터 폴 알렉스 데이빗 크리스 제이슨 케빈중의 하나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열명중 일곱은 제니퍼 리사 린다 그레이스 자넷 캐떠린 제인 중의 하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렇게 흔한 이름들을 즐겨 쓴다.

결과적으로 '흔하디 흔한 한국성'에 '흔하디 흔한 미국이름'이 붙은 한인들의 이름들.. 마이클 킴, 제임스 리, 리사 박, 그레이스 초이.. 이런 이름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이름과 성을 같이 붙여도 누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신문에 누가 자살했다고 기사가 났다. 성과 이름만 보고선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혹시? 나이를 보고 사진을 보고서야 안심을 한다. 딴 제임스 킴이구나.


영어 이름이 꼭 필요해?
근데 한인들이 과연 영어이름이 꼭 필요할까? 미국인들과 자주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은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영어이름이 필수다. 하지만 한인촌에서 벌어먹고 사는 대부분의 이민 1세들에게 영어이름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상당수의 사람은 '필요가 없어서' 영어이름 대신 그냥 한국이름을 가지고 간다. 

영어 이름이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한인들은 한인들끼리 누군가가 자기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ㅇㅇ야’는 말할 것도 없고 ‘ㅇㅇ씨’라고 불리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호칭은 아랫사람에게나 하는 것으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도 ‘ㅇㅇ님’이라고 불리우길 원한다. 그래서 한인 이민1세 백명중 아흔아홉명은 사장님, 선생님이거나 집사님, 권사님이다. 이런 한인들이 누군가가 자기를 ‘헤이 마이클-‘ 이라고 부르는 걸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 한인들은 외국인에게 자기가 자기를 소개하면서도 미스타김 미스타리다.

그래서 학교에 다녀야 하는 나이를 제외하곤 이민 1세들 중에는 한국이름을 그대로 가진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오가며 만나는 사람을 대충 종합해 보건대 이민 1세대들 중 80% 정도는 한국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식으로 자기 이름을 바꾼 이민 1세들은 아마도.. 십중팔구 자기 한국이름이 촌스러웠던 경우일 것이다. 만석이, 봉자, 칠득이, 쌍녀.. 그래서 '칠득이'가 Ted가 되고 '봉자'가 Vivian이 된다. 그리고 미국이름을 가진 일부는 아마 한국에서 죄짓고 도망온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하고..ㅎ 암튼 대부분의 이민 1세들에게 미국이름은 현실적으로 전혀 필요하지 않은 떨거지다.


생긴 것 따로, 이름 따로
난 한동안 한인들이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색한 건 둘째치고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 미국식 이름을 새로 갖는 게 괜히 영혼을 팔아먹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인들이 미들네임에 자기의 한국이름을 이니셜로 흔적을 남겨두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아직도 팔봉이를 스티브라고 부르고 순자를 린다라고 부르는 게 여전히 느끼하고 어색하다. 신석봉이 마이클 신(Michael Shin)이 되고, 김만석이 크리스 김(Chris Kim)이 된다. 아줌마들의 경우는 더하다. 미국으로 와서 남편성 따라 성이 바뀌고 제 입맛대로 이름도 미국이름으로 바꾼다. 이덕자가 재클린 추(Jacqueline Chu)가 된다. 여자들은 그야말로 미국에 와서 완전히 탈바꿈을 하고 새로 태어난다. 재클린 추가 이덕자였음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리.

생긴 건 박복실인데 이름은 이사벨라 팍(Isabella Park)이다. 말하는 싸가지는 방귀자인데 이름은 애쉴리 방(Ashley Bahang)이고, 하는 행동은 김쌍녀인데 이름은 베아트리체 킴(Beatrice Kim)이다. 이분들.. 되레 실수한거다. 지가 베아트리체래.. ㅋㅋ 사실 난 이런 사람들을 좀 경멸했었다. 설령 자기 한국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면 부르기 쉽게 고치고, 한국이름이 혐오스럽다면 예쁜 한국이름으로 고치면 되지 왜 미국식 이름을..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차에 번즈아저씨가 우리에게 영어이름을 지어줬다. Jon 과 Wendy.. Irish 이름이다. 근데 이 양반 한술 더 떠 Last Name 까지 지어주는 게 아닌가. 그래서 번즈아저씨가 지어준 영어이름은 Jon Peace 와 Wendy Peace다. Peace가 우리 성이다. 아무리 그래도 성까지 바꾸는 건 좀 그렇다고 했더니, 이분이 그때 뭔가를 차분하게 말씀하셨더랬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영어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짧을 때라 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었다. 얼핏 듣기에 유럽인들 중에도 미국에 오면서 자기 성을 바꾼 경우가 무척 많았다.. 이민 심사관이 임의로 잘라버린 경우도 있고 스스로 고친 경우도 많았다.. 미국에서 살다 보면 때로는 이름 때문에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정확한 주제는 파악을 못했었다. 하지만 그 뜻이 무엇이었든 나는 Jon Peace는 커녕 Jon이라는 이름도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도 쭉 그냥 Yeo P. Yoon 이었다. 


허름한 공사판의 이름없는 인부들 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신분증상에는 분명히 한국이름인데 사회생활은 미국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이다. 신분증상 이름을 아예 미국식으로 바꿔버린 경우는 20% 정도에 불과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한인들이 미국이름을 쓰는 것이다. 영어권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 왜 이러고 다닐까?..

내가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한국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단 한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전부 마이클 스티브 폴 앤드류 제이 피터 제프 케빈.. 그때 불현듯 스친 생각, ‘띠바 이런 애들한테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 필요가 있나?’ 나는 이름을 제대로 알려줬는고, 상대방은 무성의하게 예명만 불러준 듯 억울했다. 

또 죄지은 게 없고 숨길 게 없으니 난 한국이름을 그냥 쓰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만 돌이켜 보니 나 역시 굉장히 숨기며 살아왔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난 내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한 분들조차도 내가 한국에서 뭐하다 온 놈인지 잘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이렇게 나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거다. 

슬슬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놈들도 자기 이름 안 밝히는데 나만 미쳤다고 내 이름 진짜로 밝힐 이유가 있나, 그리고 앞으로도 내 과거 얘긴 전혀 안할 거면 굳이 진짜 한국 이름을 밝힐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나도 '윤여평'을 접고 'Jon Yoon'이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나도 그들처럼 자기 이름을 숨긴 채 흔하디 흔한 마이클과 제임스로 살기로 한 것이다. 한국으로 따진다면 허름한 공사장의 이름없는 인부들인 김씨 이씨로 사는 셈이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을만큼 자신이 자랑스럽고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미국이름은 아주 유용한 가면이다.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곳, 마이클과 제임스, 린다와 제니퍼는 나를 숨겨주는 훌륭한 가면이다.


익명의 섬
마음을 열지 않고 사람들과 늘 일정한 담을 쌓은 채 지내는 이민생활.
자기의 이름조차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그 척박한 이민생활.

사람들이 모두 흔하디 흔한 이름속에 꼭꼭 숨어사는 섬
사람들이 모두 흔하디 흔한 가면속에 꼭꼭 숨어사는 섬
'익명의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