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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얘기

김민기

나는 김민기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객관적 음악성이나 한국 대중음악에의 기여도.. 뭐 이런걸 따지는 게 아니다.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이 그냥 그렇다. 대한민국 포크음악의 전설, 김민기.. 아직까지도 난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 물결 같은 것이 인다. 왠지는 모른다.

70년대 중반, 막내삼촌이 처음 보여준 김민기 아침이슬 음반, 물론 '빽판'이다. 삼촌은 아주 귀한 보물인양 그걸 꺼내면서 자랑을 했었다. 원판은 찍어낸 수량이 원체 적고, 꽤 오랫동안 금지음반일 것이니 앞으론 이 빽판조차도 구하기 어려울 거라며 ‘나중에 돈 좀 될거’ 라면서 자랑했었다. 삼촌이 아직까지도 그걸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난 그걸 카셋테잎에 담아 얻어 가졌었다.

그 당시엔 아무것도 몰랐다. 김민기가 누구인지, 금지곡이 뭔지.. 몇년후 고등학생이 되었을때 그의 노래들을 다시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근덕 바닷가에 놀러왔던 대학생들로 부터였다. 모닥불가에 모여앉아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 귀에 익었다. 김민기였다. 집에 오자마자 쳐박아 두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다시 찾아 들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김민기라는 남자.. 마술에 걸린 듯 나는 김민기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나의 산이 되었다. 나는 김민기 태산을 받드는 신자가 되었다. 물론 그때엔 그저 김민기가 가졌었던 ‘신비로운’ 이미지에 영향받은 바가 컸겠다. 그러나 철이 들어가면서까지도 그 산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의 노래가 가진 절묘한 은유와 신비한 허무, 그리고 그 노랫말을 빛내주는 천재적인 멜로디가 내 혼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김민기의 모든 노래 가사를 외우고 코드를 따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작정을 하고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한 건 바로 김민기의 친구와 아침이슬 때문이었다. 아침이슬에서 G Am D7 C Em의 평이한 코드웍에 [B7 A7] 이 끼어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그 엄청난 감동의 회오리에 넋을 잃었었다. 베이스러닝을 바꾼 것 하나로도 노래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마술에 홀렸었다.

시인 작곡가 편곡가..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란 바로 김민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아무 가수를 ‘노래하는 음유시인’라고 칭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특히 피래미 안치환을 '제 2의 김민기'라고 칭하는 것은 정말이지 털이 곤두설만큼 듣기 싫었었다)

그렇게 김민기를 '숭배'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실체는 전혀 몰랐다. 그의 생각은 커녕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는 있는건지 죽은 건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별로 내키지도 않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모두 김민기 때문이었다. 김민기와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걸 김민기의 시각(김민기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했었다. 김민기라면 이걸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김민기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정작 아는 건 하나도 없었으면서 나는 그렇게 김민기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다지도 무식하고 단순한 숭배는 없을 것이었다. 김민기는 베일에 싸인 태산이었다. 끝없는 바다였다. 그에 대한 숭배는 식을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김민기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하날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나는 민주니 투쟁이니 하는 건 전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기노래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지 자기는 본래 운동을 염두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운동을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슬픔 혹은 젊은이의 보편적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친구'는 고3때 같이 동해안에 갔다가 익사한 친구를 그리워하면 지었습니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대시절 정년퇴임하는 선임하사를 위해 만들었고 ‘상록수’는 공장시절 동료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아침이슬'도 아침동산의 풍경을 마음에 비춰 묘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대적 의미로 쓰이더군요. 아마도 내 노래에 우리의 풍경을 담은 '스토리'가 있으니 수용자들이 시대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내 노래들은 대상을 멀찌감치 응시하는, 일종의 짝사랑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항가수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미화합니다. 과분합니다. 내 노래는 보편적 정서, 슬픔으로 사람들과 공명하고픈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했지요. 그때문인지 80년대 학생운동권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식인적 나약함, 개인적 상념'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난 그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 노래에서 비장감을 느꼈다면 그건 70년대식 정서와의 조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80년대는 삭막했습니다."

깜짝 놀랐다. 나의 태산이며 우상이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에 ‘사실 난 암것도 몰라유’ 라는 고백이었으니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김민기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 혼란은 잠시.. 나는 계속 김민기의 충직한 숭배자로 남았다. 그의 솔직함과 그렇게 솔직할 수 있는 '자신감'에 또다시 매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재빨리 내 모든 생각도 김민기의 말처럼 따라 바꾸기 시작했다.

김민기의 음악활동이 애당초 저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운동권과는 더더욱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며, 그의 노래들은 그저 우리들 사는 모습을 이야기 하는 ‘아름다운 노래’ 였음을 이해했다. 그렇게 베일(내 눈의 콩깍지)을 벗자 '김민기라는 사람'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 
그늘진 곳을 배려하며 그들을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
인간의 본성을 멀찌감치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


김민기는 천재다. 그는 한국가요사의 코페르니쿠스라고들 한다. 노래를 통해 문제의식을 제기함으로써 한국 대중음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움도 노래했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의 그늘도 담담히 노래했다. 그는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아름다움보다도 진실함이 더 소중한 것일 수도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혹자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김민기 이전과 김민기 이후, 그리고 '우리들이 완전히 배제되는' 서태지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김민기의 음악을 저항음악이나 민중가요라고 분류하는 것은 김민기 음악의 위대성을 축소하는 짓이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노래를 무기로 사용하고자 한 적이 없으며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을 멈추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노래'를 했을 뿐인데 다만 사람들이 그의 그 빼어난 천재성과 시대정신을 숭배하며 제 멋대로 그를 위치짓고 있었던 거다. 김민기는 김민기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태산 김민기는 이제 내 가슴에 ‘온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푸근한 웃음으로..

내 죽기 전 언젠가 기필코 이 뭉툭한 아저씨와 소줏잔을 기울이는 시간을 만들리라. 그가 사는 옆집으로 이사를 가 몇년을 아침인사를 하며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말이다. 내 이분께 소주 한잔 따라 드리고 이분이 따라 주시는 잔을 하나 받고.. 얼큰히 취해갈 무렵 특별히 청해 내가 기타반주를 해 드릴 수 있게 허락을 받고, 내 기타에 맞춰 그가 부르는 '친구'와 '아침이슬'을 기필코 듣고야 말리라.

김민기님.
그 날이 올때까지 부디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