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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얘기

[Pearly Shell 진주조개잡이] - 85년 여름, 마지막과 뒤섞이다

1985년 여름,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되지 않을 무렵, 기타반 후배들과 함께 서해안의 어느 해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게 연포였는지 대천이었는지 또 다른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나도 내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개구리복 입고 철원땅을 아주 떠나왔으니 더이상 군인이 아닌 건 확실한데, 복학하기 이전이니 아직 학생은 아니고, 그렇다고 학생이 아닌 것도 아니고.. 한동안 놀아도 되련만 한달 후 복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주는 압박감에 마음은 불편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물건, 그게 바로 나였다. 도대체가 내가 있는 좌표가 어디인지 헤매고 있을 그 무렵, 서해바다에 갔었다.

그 전까지 내가 찾던 바다는 오직 동해바다였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 가슴에 뜨거운 것이 불끈했었다. 그래서 피 끓던 다른 청춘들이 다 그러했듯 나도 늘 열정을 마음에 담고 동해바다로 가곤 했었다.

그러나 ‘군대에 다녀온 남자’ 라는 무거운 계급장을 단 그땐 우연히 동해가 아닌 서해바다에 서있게 되었다. 아주 어릴적 만리포 이후 처음으로 보는 서해바다는 동해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서해바다위엔 '저녁 노을'이란게 있었다. 동해바다에선 보지 못하던 광경.

‘해뜨는 동쪽’이 아닌 ‘해지는 서쪽’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서해바다는 매우 고요했다.
그때 송창식의 노래가 생각났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송창식은 왜 이런 느낌으로 동해바다로 간다고 했을까. 그럴때엔 서해가 오히려 제격인 것 같은데. 가사를 잘못 썼어 송창식.. 그렇게 서해는 조용했다.


나 스무살 시절에 보던 복학생들. 그들에겐 늙은이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청춘과는 완전히 헤어진 늙수구레 '아저씨'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어느덧 내가 바로 그 냄새 나는 복학생 신분을 코 앞에 두고 서해바다에 앉아 있다.

계속 머리속에 어떤 느낌하나가 맴돈다. ‘마지막..’
도대체 뭐가 마지막이라는 걸까? 오히려 이제 다시 시작이건만.. 내 머리 속에 끝없이 맴도는 그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정체가 궁금했다. 청춘을 영원히 잠재워 서해바다로 띄워 보내는 장엄한 느낌이었까, 앞서 졸업반이 된 후배들과 인연의 끝이 머지 않았다는 이별의 예감이었을까. 뭐가 마지막이라고 이리 절절할까?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 참 묘하게도 슬픈 단어였다. 그러나 한편 유치한 희열이기도 했다. 그냥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주는 애틋함에 취하기로 했다. 마지막을 자꾸 되뇌이니 슬픔이 커지고.. 가슴이 열리고.. 술이 땡기고.. 그 묘한 느낌이 그런대로 괜찮다. 맥주든 소주든 술이면 착착 붙는다. 성산포 아저씨 말대로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동해바다가 취한 건 많이 봤지만 서해바다가 취한 건 처음 봤다. 동해바다는 취하면 웃고 떠드는데 서해바다는 취하면 슬퍼한다. 서해바다는 처음에 술 배우길 아주 잘못 배웠다.


이미 졸업반이 된 후배들이 오래도록 떠나있다가 돌아온 선배를 반겨주는 그 따뜻한 마음이 더더욱 아련했던 것은 그때 그렇게 그들이 내게 주던 따뜻한 사랑이, ‘마지막’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주는 슬픔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망할놈의 ‘마지막’이라는 그 단어는 내가 서해바다에 있는 동안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할말이 남아있어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근처를 머뭇대는 나그네처럼 어정쩡하게 내 가슴 밑바닥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생경한 그 느낌이 계속 내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다음날 오후,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민박집 공터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마지막’을 향해 시간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짜로 묘해진다. 이게 뭘까? 여기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 이게 진짜 마지막인가? 가다가 교통사고로 모두 황천길로 간다는 건지, 서울에 도착하면 모르는 남남처럼 헤어진다는 건지, 이제부턴 도서관에 틀어박혀 새사람이 된다는 건지, 버스를 타는 순간 내 청춘과 이별이라는 건지.. 아직도 정체불명이었다. 그저 긴박한 느낌만 있었다.

민박집 주인이 켜놓은 카셋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새.파.란. 아니 새빨간..’ 하면서 즐겁게 따라하던 아주 흥겨운 노래.. 그런데 그날은 마치 옷 갈아입고 화장을 지우고 나타나 슬픈표정으로 신세타령을 하는 작부처럼 다르게 들렸다.

그때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정체불명의 느낌을 타고 가슴을 적시던 음악
그렇게 나 혼자서 내 청춘에 이별을 고하던 음악, Pearly Shell - Billy Vaughn

이제는 ‘마지막’과 ‘시작’이 늘 붙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런 걸 깨달아버린 내가 아주 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때 가슴을 저미던 그 슬픔이 그립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