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걷는지를 간단하게 말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만들었습니다.
some walk to remember, some walk to forget.
호텔 캘리포니아의 가사 some dance to remember, some dance to forget에서 따왔습니다. 오래 걷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주 깊은 생각에 빠지는 순간들도 많습니다. 그 생각의 순간들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동안 잊혀지던 좋은 기억과 생각들은 가다듬어지고, 나쁜 생각들은 정리됩니다. 왜 천천히 걸을때 뇌기능이 긍적적으로 활동하는지 그 메카니즘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부정적인 생각들이 단순화되어 긍적적으로 변화됩니다. '기억과 생각들의 발전적 정리과정'인거죠. 그래서 한동안 걸으면 많은 것들이 채워져서 뿌듯하고, 많은 것들이 비워내어져 개운합니다. 걷는만큼 '인생'도 보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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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남미 Patagonia를 걸으려고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가려면 40시간 안팎의 이동시간이라 한국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판에 미 서부 Grand Circle로 바꿨습니다. '미주트레킹'이라는 곳에서 제시하는 일정에 그랜드캐년 노스림(north rim)에서 내려가 콜로라도 강 팬텀랜치(phantom ranch)에서 1박하고, 사우스림(south rim)으로 올라오는 게 있었습니다. 몇년전 시간에 쫓겨 콜로라도강을 찍지 못하고 올라온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던 데다가, 1년전 예약을 해야 한다는 팬텀랜치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말에 '의심도 없이' 계약금을 보냈습니다.
지인에게 그랜드써클 걸으러 간다고 얘길 했더니 불쑥 '자이언 캐년이 그랜드 캐년보다 더 낫더라'는 말을 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몇번 가봤었지만 자이언의 기억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이언의 기억이 왜 이렇게 없는지 이상하긴 합니다. 이십여년전 그곳을 제게 처음으로 추천해 줬던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Zion Canyon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곳이고, Bryce Canyon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곳이다'.. 그래서 자이언에 갔을 때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만 보고 왔었고, 그래서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이번에는 다릅니다. 땀흘리는 hiker들만의 특전.. 자이언캐년 위로 걸어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됩니다. 자이언캐년은 진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곳이 맞는지.. 그리고 왜 자이언캐년이 그랜드캐년보다 더 낫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번에 확인될 겁니다.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자이언 캐년' 국립공원이 아니라 그냥 '자이언' 국립공원이라는 것, 자이언캐년은 자이언 국립공원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이언캐년을 보려면 승용차에서 내려 국립공원 셔틀버스를 타고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야만 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헛웃음이 났습니다. 한국에서 온 지인들을 데리고 두어번 이곳에 왔었을때, 겨우 자이언의 입구 언저리에 서선 '이게 자이언 캐년이다'라고 하곤 돌아왔었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자이언 캐년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이언캐년의 깊숙한 곳에 발을 내딛으니, 예전 와이오밍의 어느 강가에서 봤던 '비현실적'인 경치들이 이곳에도 펼쳐져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雨中 자이언'.. 왜 이곳이 시온(Zion)이라 이름지어졌는지 이해가 되는 정경입니다. 저같은 무신론자도 뭔지 모를 경외심을 느끼는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땅 시온을 떠올렸다는 건 아주 당연해 보입니다. 빗속 스마트폰 사진에 한계가 있어 퍼왔습니다.
계곡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니 '자이언은 위로 올려다보는 곳'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이 맞습니다. 줄 지어선 붉고 거대한 벼랑들이 내뿜는 위엄이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압도합니다. 오늘 걷는 곳의 이름들이 왜 그렇게 종교적인 이름 일색인지 이해가 됩니다. Zion Canyon(시온 협곡)의 Virgin River(처녀 강)을 건너, Angel's Landing(천사 강림)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 신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합니다.
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로운 오르막 길이 끝나자 힘든 길이 시작됩니다. 끝없는 지그재그 꼬부랑 오르막 길, 소위 스위치백(switchbacks)입니다. 근데 아무도 힘들어하지 않고 모두 깃털처럼 걷습니다. 워낙 평소에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의 소유자들인지 아니면 자이언의 신비한 기운이 사람들로 하여금 힘든줄 모르고 걷게 하는건지.. 아무튼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LA에서 맹훈련하고 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훈련없이 왔었더라면 망신살에 민폐 끼칠뻔 했습니다. 그렇게 한시간 남짓 오르자 깎아지른 벼랑이 앞을 막아섭니다.
생김새나 각도로 보아 당연히 벼랑 옆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랍니다. 이 벼랑자체가 오늘 목표점인 Angel's Landing의 Trail 시작점이랍니다. 서로 웃으며 묻습니다. 진짜? 이 빗속에 저길 올라간다고? 설마..
올라간답니다. 하긴 명색이 천사가 강림(Angel's Landing)한다는 곳, 우리식으로는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오는 곳'인데, 사람의 발길을 호락호락 허락하겠습니까. 문득 외람된 것 하나가 궁금해집니다. 근데 저 벼랑 꼭대기는 과연 어떤 천사들이 내려오는 곳일까? 세뇌된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는 이런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경속 진짜 천사는 이런 '천사표' 천사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온몸이 여섯개의 날개로 이루어져 있는 형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겼을 겁니다.
이들이 얼마나 기괴하게 생겼길래 이들이 인간을 만나 처음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였을까요. 아무튼 이곳의 이름 '천사강림'이 과연 어떤 천사를 염두에 두고 붙여진 이름일지 궁금합니다. 짐승처럼 바위에 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위험한 길을 쇠줄하나만 달랑 매어놓고 올라가게 하다니.. 위험감수는 전적으로 your responsibility 네 책임이라는 미국입니다.
쌀쌀한 기온에 빗물 미끄러운 바위를 차가운 쇠줄을 잡고 오르는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삼십분쯤 올라 끝이구나 생각했을때 벼랑이 하나 더 나타납니다. 신발바닥이 미끄러웠거나 비옷이 없던 사람들중 일부가 거기서 포기합니다. 두번째 벼랑을 오르길 한동안.. 드디어 벼랑끝에 섭니다.
숨이 뻥 뚫리리라 기대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되레 숨이 턱-하고 막힙니다. 비가 새어들어 젖은 몸도, 차가운 쇠줄을 잡느라 잔뜩 곱았던 손가락도 순식간에 잊게 만드는 곳.. 천사가 내려온다는 곳, 자이언의 제1명소 Angel's Landing의 어마무시한 view입니다.
흙을 뚫고 암석들이 치솟아 올라와 있습니다.
마치 '뼈가 피부를 뚫고 치솟아올라 피를 흘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도저히 人間界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공포스럽기까지 한 곳.. 옛 미국인들도 아마 똑같이 느꼈었을 겁니다. 人間界와 天上界의 중간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 천사들이 내려오는 곳이라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땅 시온(Zion) 그리고 천사강림(Angel's Landing)이라 이름 붙였었을 겁니다.
'과연 어떤 천사?' 이 궁금증은 금세 풀렸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여섯날개를 가진 무서운 천사'입니다. 물질과 권위만 숭배하는 삿된 목사와 삿된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이곳에 오지 말기를 권합니다. 여섯날개 천사들에게 잡혀가거나 현장에서 죽임을 당할 분위기입니다.
여행전 떠올렸었던 두 얘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첫번째 '그랜드캐년보다 자이언캐년이 더 멋지다'는 얘긴 일단 맞습니다. 열흘쯤 후 그랜드캐년에 가면 그때 다시 생각이 바뀔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이언이 더 멋진 것이 맞습니다.
두번째 '자이언캐년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곳'이라는 얘긴 틀렸습니다. 그건 여행사 가이드들이 편의를 위해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자이언캐년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봐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올라온 곳은 자이언캐년의 한쪽 벽 West Rim입니다. 다음 일정은 계곡아래 Virgin River에 발을 담그고 걸어 올라간답니다. 이름하여 'The Narrows Trail'입니다.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봤으니 이번엔 계곡 깊숙히 걸어본다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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