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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무작정 빌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좀..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직접 이 ‘원수’란 단어를 언급하시며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으로 성서의 작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런 전투적, 호전적인 단어를 사용하셨을 리가 없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그렇다 치고.. 그나저나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

1.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나 그를 사랑하든지 무시하든지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가 잘못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즉,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상대만 잘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잘하고 상대가 잘못했으나 그걸 용서한다는 얘기다.

2. 상대를 용서하려면 ‘상대방이 비록 잘못 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역시 ‘상대의 잘못을 가까스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3. 어렵사리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 나니 드디어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원수를 이해하고 용서하니 내 마음이 참 편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모든 일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글로는 쉽지만 이거 생각만큼 쉬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 종교의 힘을 빈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게 해주소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원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렇게 '빈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슨 소리냐 하면..

잘못이 내게 있다면 내가 고치면 되는데 잘못이 상대에게 있으니까 그걸 해결해 달라고 비는 거다.

세상이 내 위주이면 불쑥불쑥 세상에 대한 원망이 솟고, 미워하는 대상이 생기고 또 고통스럽다. 세상사람들이 다 내맘만 같다면 이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오겠건만 사람들은 왜 이리도 사악할까.. 그렇지만 그들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하고 또 용서한다. 근데 안된다. 그래서 비는거다. 계속 절대자를 찾고 그래서 종교가 극성인거다.


하나님(예수님), 부처님은 누구인가?
혹시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나의 욕심을 이루어 주시는 분, 불가능한 일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분 아니신가? 나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가령 노력은 조금 했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런 걸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부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는가?

근데 만약 당신이 뭔가로 고통스러웠을 때 그렇게 하나님과 부처님의 도움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났다면 당신은 그 고통에서 영원히 자유로워 졌는가? 이후에도 끊임없는 찾아오는 유혹과 번뇌 사이에서 계속 혼란스러워 하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 자신이 더더욱 혐오스러워서 더 열심히 그분들께 진리를 갈구하지 않았나? 믿음이 부족한 나를, 신심이 부족한 나를 용서해 주시고 더욱 채찍질 해달라며..


만약 당신의 인생이 지금 고통스럽다고 하자. 왜 그럴까?
예전 어떤 분이 예를 들어주셨던 쥐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어떤 쥐가 한탄을 한다. 온통 주변이 쥐약투성이라서 힘들다. 왜 쥐약이 이리 많을까? 

1. 하나님이 시험하고 계시거나 더욱 강해지라고 담금질을 하고 계시다.
2.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그 업보를 받고 있다.
3. 그 쥐가 사는 데가 원래 그렇다.

답은 3번이다. 살다보니 사람주변에 살게 되었고 사람들이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늘어놓은 것뿐이다.

그 쥐가 쥐약을 먹고 죽었다. 왜 그랬을까?

1.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거나 위에서 쓸 데가 있어 일찍 데리고 가셨다.
2.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그 업보를 받았다.
3. 쥐약인지 모르고 먹었다.

답은 3번이다. 쥐는 그 쥐약이 맛있는 음식인 줄 알고 먹었다. 먹으면 좋을 줄 알고 먹었는데 죽었다.


내가 몰라서 고통스럽다
내가 가진 지금 고통은 누가 우릴 시험하시는 것도 아니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도 그런 것도 아니고 타고난 사주팔자가 그래서도 아니다. 고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몰라서 그렇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걸 어깨에 짊어졌을 뿐이다. 그걸 몰라서 그렇다.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스스로 괴로움을 짓고 그걸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그러다보니 세상이 불공평해 보이고, 내가 초라해 보이고, 억울하고 분하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거다.

내 코에 걸린 색안경 너머 보이는 세상의 그 색깔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니 그 색안경만 벗어 내려놓으면 될 터인데, 우리들은 교회를 찾아가서 회개를 하네, 절에 찾아가서 참회를 하네, 방구석에 앉아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갈구를 하네.. 법석을 떤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그렇게 교회에서 절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지라도 불구덩이 세상으로 돌아오면 바로 그 즉시 그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 나처럼 하나님의 뜻, 부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왜 자꾸 고통에 빠뜨리느냐 억울해 하며 열심히 기도하며 급기야 강요한다. 어이.. 씨바 날 좀 제대로 평가하시란 말요.



세상 모든 고통은 누가 내 어깨에 억지로 올려놓은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짊어진 것이다. 검은색 안경을 낀 놈은 세상이 검다 하고 노란색 안경을 낀 놈은 세상이 노랗다 하니 서로들 고통스럽다. 그러나 서로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할 원수 자체가 없고’
‘참아야 할 분노 자체가 없고’
‘원망할 대상 조차도 없는’ 평화롭고 고통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을 좀 해보자
혹시 그동안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통해서도 아직 고통의 근원이 어디인지 깨닫지 못했다면 말이지.. 그리고 혹시 그렇게 우러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갈구했건만 아직도 나를 내팽겨쳐 두고 계시다고 느껴진다면 말이지..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이나 부처님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또 다른 고통이 생긴 적이 있다면 말이지..

이번 기회에 잠시동안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떠나서 혼자 그 답을 사색해 보면 어떨까?
고통을 잊으려 기도하지 말고 그 고통의 근원을 알고 그것을 내려놓으려 공부해 보면 어떨까?

내가 공부해서, 내가 사색해서.. 내려 놓을 수만 있다면
미워하고 사랑할 대상조차도 없는 대자유를 얻을텐데 이거 참 멋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