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한 한국식당. 한 주부가 데리고 온 두명의 어린애들. 식당안을 떠들며 뛰어다니는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엄마는 자식들의 그 난리통을 몰라라 한 채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만 열심히 읽고 있다. 식사가 나와 아이들이 의자에 앉자마자 그녀는 큰소리로 감사기도를 시작했다. 식당안의 모든 손님들이 쳐다볼 정도의 큰 소리. 1분 가까이 그녀와 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큰소리로 기도를 했다. 그 요란하던 아이들도 기도시간엔 놀랄만큼 경건한 모습이다. 우렁찬 아멘소리와 함께 기도가 끝난 후, 아이들은 또 다시 난장판.. 그러나 그 아이들의 엄마, 계속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엄마에게 공중도덕이나 예의범절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자식들에게 대한 교육기준은 오로지 ‘신앙’인 듯 했다. 자기 새끼들이 공공장소에서 아무리 떠들면서 뛰어다녀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임을 그 엄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직 내 새끼는 믿음만 튼튼하면 된다. 그래서 믿음 좋은 내 새끼는 무슨 짓을 해도 이쁘다.. 그 엄마는 기도에 조용히 참여하는 자기새끼들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예뻐하고 있었다.
물론 제 새끼에 대해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몽매한 부모일수록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자기 자식의 일엔 장님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자식을 ‘오냐 오냐’ 하며 키운다. 하지만 현명한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무조건 사랑이 오히려 아이들의 미래를 죽이는 것임을 이들은 잘 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의 교육에 엄하다. 그런 엄한 교육만이 아이들의 장래를 보장할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엄한 훈육으로 승화시킨다.
나는 부모의 과잉보호와 무조건 사랑속에서 제 멋대로 성장했던 한 남자가 사회생활속에서 고투를 벌이다 외롭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는 살아있는 내내 끊임없이 사투를 벌였었다. 내면에 감추어진 자아와 밖으로 드러나는 사회적인 모습의 충돌로 그는 매일매일이 혈전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인간은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관계를 맺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성이 기반이 되어야 자아도 형성되는 것인데, 성장기에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 사회성이 결여되면 자기 중심의 껍질을 벗지 못한채 성인이 된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버릇없는 사람으로 완성되어 더 이상 성장이 멈춘 것이다.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공동체적 사회성이 결여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살아남기가 어렵다. 철이 들면서 자신의 나쁜 모습을 깨닫고 인위적으로 그것을 감추어보려 하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사회성이 결여된 자아’는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사회생활에 실패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잉 보호로 치우치는 것은 이렇게 자기자식을 인생의 실패자로 살아갈 준비만 시켜주는 셈이 된다. 결국 과잉보호는 자기자식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고 만다.
(한겨레)
요즈음 우리나라의 보수신문들의 행태를 보면 LA의 이 엄마가 떠오른다. 나라를 망치려고 아예 작정을 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남의 새끼가 일을 벌였을 땐 그렇게 광기어린 비난을 쏟아붓더니, 똑 같은 일인데도 지 새끼가 벌이자 태도가 돌변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자신들이 일년전 생산해내었던 광우병 괴담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나섰다. 자기네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반성도 없다. 국민들을 아무리 우습게 보아도 유분수지 해도 너무 한다. 최소한의 부끄럼마저도 없다. 믿음만 좋으면 무슨 짓을 해도 예뻐하는 LA의 그 엄마다. 미래에 등신으로 살든 말든 일단 제 말을 잘 듣는 '믿음 좋은' 새끼는 뭐든지 다 이쁘다.
과연 그들에게 믿음(보수)이란 무엇일까? 다름아닌 ‘반공’과 ‘숭미’일 것이다.
내가 좌파의 무분별한 ‘분배’나 ‘종북’만큼이나 혐오하는 게 바로 우파의 무분별한 ‘반공’과 ‘숭미’이다. 따라서 예전의 월간 말이나 얼마전의 오마이뉴스, 그리고 작금의 보수신문들.. 모두 다 자식의 미래를 망치는 몽매한 엄마의 모습이다.
하지만 요즈음 보수 반공숭미신문들의 철면피는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내 새끼의 악행을 나무라는 동네 어른에게 ‘내 새끼 기 죽이지 말라’며 눈깔 뒤집고 바락바락 대드는 무식한 엄마 꼴이다. 자식을 아주 등신 만들려고 작정을 했다.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경향)
우리나라의 추악한 언론권력의 횡포에 무력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번 일은 실로 나를 절망하게 한다. ‘숭례문이 불타면 국운이 다한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정도전 괴담이 믿어지려고 한다. 만일 진짜 우리의 국운이 다했다면 그 책임의 8할은 바로 이 추악한 언론권력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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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나는 이번 광우병 소동이 별로 달갑지 않다. 마치 광우병 위험만 없으면 소고기는 먹어도 된다는 생각이 거꾸로 박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동이 달갑지 않은 진짜 이유는 광우병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라는 주장과 근거없는 광우병 괴담들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전열 재정비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동안 누적된 국정실패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광우병 괴담으로 인해 그 치명상을 피했고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보수 반공숭미신문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광우병 최전선에 나선 것도 바로 이 맥락이다. 당장 내 새끼가 이뻐서 자식의 미래를 죽이는 몽매한 엄마, 조중동에게 ‘미친소 너나 먹어’ 라는 구호는 아주 만만한 먹이거리가 된다. 벌써 그 반격은 시작되었다.
(조선)
이명박과 그의 몽매한 엄마, 반공숭미언론들은 ‘과장된 광우병 괴담에 국민들이 혹세무민되었고 그 틈을 타 불순세력들이 반미선동을 하니 이 무식한 국민들을 빨리 교육해야 한다.’로 방향을 잡았다. 전형적인 간신상, 청와대 대변인은 이틈을 타 기사회생했다. 국민들의 시선이 온통 광우병 괴담에 쏠리는 동안 저 타락한 상대방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우리가 광우병 괴담에 휩쓸리는 것은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있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전선을 펼쳐야 할 곳은 광우병 쇠고기가 아니다. 이 비이성적인 광우병 괴담은 괜한 역풍만 불러 일으켜 전선만 흐트러뜨릴 뿐이다.
우리가 이명박에게 분노하는 것이 과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인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다른데에 있다. 경제성장 수치에 목숨을 건 이명박이 부시 별장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어떻게든 수출이라도 좀 늘려 제 성과를 올리고자 등신외교를 펼치자 비로소 우리는 이명박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 분노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가뜩이나 양심해 반해가면서까지 뽑은 대통령이라 국민들이 찜찜했었는데 영어공교육, 강부자 고소영 파동으로 잽을 맞고, 교육자율화 조치로 스트레이트를 맞고, 이번에 이 한심한 등신외교에 어퍼컷을 맞은 국민들이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고 또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한 35%의 국민들에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저 부도덕하고 불안한 자에게 나라를 계속 맡겨뒀다간 나라가 절단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런 국민들이 불안한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미친소 너나 먹어’라는 구호.. 반격의 기회만 줄 뿐이다. 자승자박의 사태를 불러 되레 그들을 옥죄어 올 수도 있다. 국민들의 진정한 뜻이 이 비이성적인 구호로 인해 흐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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