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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얘기

이영훈 - 꼭 다시 만나야 했었던 사람

그의 음악이 꼭 필요했는데 마침 Y가 그와 ‘아주 절친한’ 사이라고 했다. 약속을 잡아줘서 그의 작업실로 찾아가기로 했다. 반포였던가 서초동이었든가.. 겉모양은 아파트와 비슷하게 생긴 그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인기인은 아니더라도 알음알음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아니든가.. 그와의 첫 대면이 내심 걱정되었다. 왜냐하면 '디지게 맞아야 할' 몰상식하고 무례한 '백일섭'이라는 인간과의 불쾌한 기억이 당시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양반도 혹시’ 그러나 Y는 그를 정말 '사람좋은' 사람이라고 그랬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어떤 사람일까..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문이 열리면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 가 얼굴이 터져나갈 듯한 환한 웃음으로 반겨준다. ‘어서 오세요. 금방 찾으셨어요?’

머리속에 상상했던 날카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예술가들이 흔히 꾸며놓은 그런 폼나고 세련된 작업실도 아니었다. 무릎 나온 바지와 허름한 와이셔츠 그리고 맨발..  마치 친한 친구의 자취방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치우긴 치웠는데 좀 지저분합니다. 이해해주십쇼. 허허’ 전혀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꽤나 유명한 사람의 작업실치곤 너무 소박했다.

바로 이 사람.. 김민기 김창완 이후 내 가슴에 세번째로 들어온 사람, 작곡가 이영훈이었다.
김민기가 약간 어둡고 김창완이 약간 밝다면 그 중간쯤 환하기를 가진 사람. 김민기가 조금 무겁고 김창완이 약간 가볍다면 그 중간쯤 무게를 가진 사람. 김민기가 흑백사진이고 김창완이 칼라사진이라면 그 중간쯤 수채화같은 빛깔을 가진 사람. 김민기처럼 시대적이지 않으면서 김창완처럼 동화적이지 않으면서.. 그냥 순수하고 서정적인 느낌의 이영훈.

그러나 사실 세 사람 모두 음악만의 느낌만이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중 하나를 직접 실물로 보는 거였다. 그래서 떨림이 있었다. 처음 본 이영훈.. 별로 낯설지 않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옛 친구 같았다. 참 편한 사람이었다.

서둘러서 일 얘기를 모두 끝마친 후, 이런 저런 다른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시간 뺏기는 걸 싫어할까봐 그만 일어서려는 시늉을 했다. 근데 ‘다행히’ 그가 잡는다. ‘지금 바쁘지 않으시면 이거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직접 러시아에 가서 녹음하고 온거예요’ 귀에 익은 우리 가곡들이다. ‘훌륭한 우리 가곡들, 꼭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돈이 안되더라도 말이지요. 그래서 좀 가지고 있던 거 여기에 다 털어 넣었습니다.’ 수익성이 없어 보이는 기획이라 음반사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영훈 기획, 이영훈 편곡, 이영훈 지휘, 이영훈 제작이다. 아니 편곡은 볼쇼이쪽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걸 기획하면서의 어려움, 러시아에 건너가서 말 안 통하는 볼쇼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녹음할 때의 이야기, 통장 잔고 줄어드는 쓰라림 같은 얘기들을 했다. 이런 큰 작업을 혼자서 직접 진행하다니, 그것도 돈이 안될게 뻔한 이 작업을.. 참 좋은 사람이구나.. 푸근하고 느긋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음악가로서의 고집도 있었고, 상당히 저돌적인 면도 있었다.

‘돈을 받지 않아야 하는건데.. 이거 하느라 제가 좀 어렵습니다. 이해해 주십쇼. 허허’ 

돈을 받는 것이, 게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온 내게 돈을 받아야 하는 것이 내심 마음 걸렸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굳이 일어서는 사람을 붙들어 앉혀놓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이렇게 돌려서 이해시키려고 했던 모양이다. 참 따뜻한 사람이다. 음악뿐 아니라 '사람'으로도 이 분을 굉장히 좋아하게 될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어색하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볼쇼이 씨디를 왕창 준다. 사람들에게 맘대로 나누어 주란다.

‘언제 Y랑 같이 술 한잔 해요’
‘작곡가님 시간만 되시면 만사 다 젖히고 나가겠습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우리쪽 사람의 무례로 인하여 계약은 일방적으로 해지되었다. 이영훈씨가 마음이 많이 상한 듯 했다. 용서를 구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것도 무산되었다. 그렇게 십오년정도의 시간이 그냥 흘렀다. 그러나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두고두고 마음 한구석 계속 남아 있었다. 억울한 오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고 미련을 남겨 둔 그런 느낌이었다.

얼마전 Y에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던 중, 고맙게도 내가 한국에 나가면 꼭 이영훈과의 술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덕분에 난 다시 이영훈을 만나는 그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적당히 늙어온 우리 둘이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 옛날 오해가 혹시 있었다면 풀고, 음악이야기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이영훈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난 그 날을 생각하며 설레어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가 한국에 나가고 싶은 중요한 이유중 하나였다.


요즈음 이영훈은 호주에 있을때부터 준비해 온 ‘광화문 연가’라는 뮤지컬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맞아. 이영훈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옛사랑’ 과 ‘광화문 연가’ 아니든가. 내년쯤 이 공연을 계획한다고 하니 이왕이면 그 공연도 보고 사람도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어제 Y 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이영훈을 만나게 해주겠다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것 같다고.. 아마 이영훈씨가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다고 하네. 그런데.. 이영훈씨 본인은 아직 그걸 모르고 있다고 하네. 그의 음악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한 노래가 있다. 


시를 위한 시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위해 울지말아요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께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께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