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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경아..오랜만에 불러보는군

70년대 초중반쯤, 국민학교 사오학년때쯤.

변두리 삼류극장에선 개봉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동네에 무차별하게 붙이곤 했었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국민학교 근처에도 여지없이 영화의 포스터들이 나붙곤 했었는데..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붙었던 영화포스터중에서 아주 도발적인 사진의 영화포스터가 하나 있었다.

젊은 여자가 윗도리만 달랑 하나 걸치고 그걸 반쯤 풀어 헤친채 서 있고, 그 여자의 배에 한 남자가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런 사진.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진인데 그때의 우리에겐 가슴이 벌렁벌렁하고도 남을 그런 대단한 사진이었다.

여기저기 붙어있던 그 포스터의 대부분들은 영화제목 정도만 보이고 나머지 사진부분은 대부분 뜯겨져 나가고 없었다. 아이들이 뜯어간 것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그 중의 한 넘이었으니까. 그러나 떡칠된 풀이 하도 강력해서 그걸 뜯으려고 시도하면 십중 팔구는 너저분하게 갈기갈기 찢어진다. 사람 없을때를 틈타 여러번 시도해 봤는데 결국은 한장도 제대로 건진게 없었다.


그 유명한 영화 ‘별들의 이야기’의 포스터다.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 그 영화에서 배우 안인숙이 연기했던 인물 '경아'. 블라우스 풀어 헤치고 서 있던 여자 '경아'.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그 영화를 보질 못해서 경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신성일의 대사, 느끼하게 읖조리던(신성일 전담 성우였는데 이름이 기억 안난다. 이사람 목소리 어지간히 느끼했었다)그 명대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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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겨울, 송충이를 통해 한 여자애를 알게 되었다. 원래 송충이 동창 한넘의 여자친구였었는데 이제는 걔랑 찢어지고 송충이가 임시로 관리하고 있다는 여자애.

송충이가 엮어줬는지 여자가 자청해서 그랬는지 기억은 없지만 엉겁결에 ‘내꺼’가 되었다.
놀랄만큼 ‘성숙한 여인’의 모습. 화장은 기본이고 부츠를 신고 정장코트를 입고..
몇번을 되물었었다. 쟤 고등학생 맞아?

이런일.. 저런일.. 참 많았다. 삼류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들.. 본동 버스정류장 사건, 한양대 병원사건, 구로동 성당사건.. 내용이 지나치게 엽기적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는다.

아무튼.. 1981년 봄,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
‘7년후에 반드시 널 파멸시켜 버릴거야’

소름이 확 끼치는 저주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 여자애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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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가한 일요일, 내무반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누워서 보고 있었으니 아마 고참시절이었나보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군바리들이 제일 싫어하던 드라마 같은 걸 보고 있었는데 아마 ‘TV 문학관’ 같은 단막극이었을 거다. 줄거리도 따라가지 않고 그저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었는데..

남자 주인공이 산길을 따라 별장 같은 곳으로 차를 몰고 가고, 그 별장에 들어서자 한 여자가 나와서 반갑게 포옹을 하고.. 곧 그들은 방에서 정사를 벌인다. 예쁘장하게 생긴 그 여배우, 참으로 오랜만에 TV에서 본다.

‘쟤 참 오랜만에 나왔네’
‘누구? 남자? 뭐가 오랜만이야 자주 나오는 편인데’
‘아니 남자 말고 여자말이야. 오랜만에 나왔잖아, 한동안 안보이더니’
‘여자?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도 첨 보는 얼굴인데..’ 다들 첨 보는 얼굴이란다.
‘쟤가 왜 신인이야 그전에 여러 번 나왔었던 앤데’
‘너 빼곤 다 쟤 처음 보는 얼굴이래잖어’

그런가? 신인인가? 허긴 신인이 아니면 이렇게 내무반 30명중에서 얼굴을 기억하는 넘이 한놈도 없을 수는 없겠지. 근데 왜 나한테는 낯이 이렇게 익을까..

별장에서 정사를 마친 넘이 다시 그곳을 떠나며 그 여배우와 포옹을 하고 차로 향한다. 떠나는 남자의 모습을 여자가 멍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때 벼락처럼 얼굴이 스친다.

’걔다’

7년후에 다시 나타나서 날 파멸시켜 버리겠다던 그 여자애였다. 가수나 탤런트가 되겠다고 했었는데 진짜로 연기자가 되어서 TV에 나왔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 아이의 마지막 퍼부은 저주의 말도 다시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7년이 되려면 아직은 좀 남았다. 왜 굳이 7년 후라고 했을까? 다시 마음이 찝찝해진다.

이후 다시는 TV에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단역으로 딱 한번 나왔다가 그걸로 끝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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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다. 한심하단 소릴 들을까봐 내색한 적은 없지만 88년을 맞이하면서 마음 한구석 꿉꿉한 것을 치울 수가 없다. 7년후에 파멸시켜 버리겠다던 원한에 찬 그 말 때문이다. 그 해가 7년 되던 해였다.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든가.

친구들은 그랬었다. 뭐 칠년전 계집애 말에 신경을 쓰냐고. 사실 난 그 아이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그저 그만 보자고 한 것 밖엔 없다. 그러나 그 여자애가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었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불안했다. 88년 한해동안 그 생각이 날때마다 불안했었다. 그러나 88년도에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그 여자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경아였다. (본명은 아니다. 자기가 지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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