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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눈 내리던 80년 마지막 날

1980년 12월 31일. 눈이 왔었다.
어떻게 그걸 기억하냐고?

외박을 밥먹듯 했었던 나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외빅은 꿈도 꾸지 못할 먼 나라 얘기였다. 피도 안 마른 녀석의 외박은 '탈선'이며 ‘항명'이기 때문에 '가출’로 간주하겠다는 아버지의 신성불가침 원칙 때문이었다. 아주 특별한 이유로 사전에 허락이 없으면 외박은 절대불가였다.

예비고사가 끝났다. 신분은 아직 분명히 고등학생이나 학교밖에서의 행동은 어른따라 흉내내던 그 무렵, 12월 31일날.. 헌이네 우이동 고모 집이 빈단다. 그래서 그곳에 모여 놀기로 했다. 이른 오후부터 우이동에 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새끼들처럼 안절부절하면서 날이 어두워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앳티가 확연하던 때, 날이 어두워지면 그 앳티가 조금은 가려질 거라는 생각 그리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 질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졌다. 폼나게 포장마차에서 소주부터한잔 하자.. 꽤나 쌀쌀한 80년의 마지막 날 저녁, 사람 없는 포장마차를 찾아 다녔다. 호기 있게 나섰지만 아무래도 어른들이 북적대는 포장마차는 좀 거북살스러웠던 거다. 후미진 길거리 어느곳에서 그렇게 아무도 없는 포장마차를 찾았다. 어른 남자들이 가는 곳, 포장마차.. 감개가 무량했다.

굳이 나이를 속일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시험 끝난 고삼이라고 당당히 얘기하고 내일부터, 엄밀히 말하면 몇시간후면 당당히 스무살이니 봐달라고 했다. 아저씨도 그러냐며 웃어 주었다. 게다가 고맙게도 담배도 피워도 된다고 먼저 얘길 해준다. 참 사려 깊은 아저씨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려가 깊은 게 아니라 참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아마 폼나게 소주를 마셨을 거다. 상당히 오바했겠지. 한잔정도는 단숨에 들이키고 캬- 했을테고.. 안주는 꼼장어나 참새구이였겠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숨어 마시던 술 맛과는 역시 다르다. 아 이 넉넉한 자유.


‘어 눈이 오네’ 

이거 슬슬 소설속의 이야기가 꾸며지기 시작하나 보다. 눈 내리는 12월 31일 밤,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이렇게 저렇게.. 빈집도 이미 마련되어 있겠다. 이제 돌아댕기는 암망아지들만 어디가서 찾으면 되는 거다.

‘근데 너 오늘 자고 간다고 허락 받았냐?’

아 띠바 분위기 깨지게스리.. 아직 아니다. 하지만 사실 그게 아까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박을 감행할거다. 마침 눈도 내리고 있지 않은가? 눈 핑계로 차가 못 다닌다고 해버리면 되지 뭐. 다행히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역시 뭔가 오늘 이루어지려나 보다. 원래 눈을 좋아했지만 그날의 그 눈은 더더욱 반갑다.

마음은 그리 먹었지만 초조하다. 아버지와의 일대 결전을 앞두고 있으니 당연하다. 다시한번 마음을 가다잡는다. 그러나 오늘은 기필코 외박을 감행하리라.. 굳게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다짐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통금전에 흑석동에 도착해야 할 테니까 아마 마지막 버스는 우이동에서 열시 반쯤에 출발하겠지. 열시반쯤 되어서 차 끊긴 다음에 전화하면 된다. 근데.. 만약 그랬다가 나중에 오히려 더 크게 혼나면 어떡하나.. 잔 대가리 굴렸다고.. 그래.. 그건 좀 비겁하고 위험하다. 당당하게 그냥  열 시쯤에 전화를 하자.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차가 아예 종점에서 출발도 못한다고 하자. 열시쯤에 전화를 했다.

‘저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요..’
‘걸어서라도 와’ 
‘오늘 31일이고, 친구들하고…’
‘당장 출발해’
‘지금 제가 갑자기 빠지면 남은 친구들이 김이 새서…’
‘출발해’

우이동에서 흑석동까지 걸어서라도 오랜다. 그냥 확 외박해 버리고 나중에 한번 크게 붙어? 그렇게 해버리까.. 그러나 절대약자였던 나는 아버지와의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결국 친구들에게 미안하게 손을 흔들며 버스를 탔다. 도살장 가는 소들이 이런 기분일까. 흑석동 가는 이 버스. 거의 막차인지 손님은 아무도 없다. 우이동에서 흑석동까지 가는 84번 동아운수. 달리는 내내 차창밖에 눈발이 휘날린다. 아- 이 좋은날, 천금 같은 이 날.. 씨바 띠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흰눈이고 뭐고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씨바 띠바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보니 버스는 이미 용산을 지나 한강다리 위에 올라섰다. 아직도 눈은 펄펄 날리고 있다. 눈 참 탐스럽게 온다. 중지도 전체가 하얗게 눈으로 덮혀 있다. 참 보기좋다. 눈 내리는 한강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내가 끝내주는 ‘쾌’를 뒤에 두고 이밤에 이 청승을 떨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다시 알았다.

시험도 모두 끝났겠다, 한해의 마지막날 이렇게 탐스럽게 눈이 내리는데 친구들과 그냥 재미나게 놀으라고 하면 어디 세상이 무너지냐. 다시 속이 부글보글 끓는다. 아 씨바띠바..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이 선한 아들을 못 살게 구시는 걸까. 씨바 띠바.. 독재자, 폭군, 파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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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호남지방에 폭설이 내리더구만. 눈 참 대차게 왔더구만. 뉴스에서 그 모습을 보다 옛날 25년전 한강을 건너다가 씨바띠바하며 봤던 그 눈 생각이 문득 났다.

늦었지만 아버지..
그때 비록 혼자서 그런거지만 아버지한테 씨바띠바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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