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캐년 트레일은 일반등산과는 반대입니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하산–등산) '희한한' 코스입니다. 아내에겐 비밀로 했었지만 이런 경고문이 있는걸 보니 그다지 쉬운 코스는 아닌 모양입니다.
콜로라도강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돌아오는 걸 '당일치기'로 하지 말라는 경고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원래 1박2일을 계획했었습니다. 근데 아래쪽 유일한 산장인 Phantom Ranch의 예약문제로 그것이 불가능해져 할 수 없이 당일치기로 바꾼겁니다. 아마 당일치기가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여름엔 더위때문이고, 겨울엔 해가 짧아서일겁니다. 그래서 각별히 조심하고 대비해야겠습니다. 그랜드캐년 트레일중 가장 많이 하는 Bright Angel Trail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시간계획을 잡았습니다.
아침 6시반 출발
오전 11시 콜로라도 강 도착
오전 11시반 콜로라도 강 출발
저녁 6시 도착
준비물을 챙기면서 제가 headlamp를 배낭에 넣는 걸 보고 '그게 왜 필요하냐'고 아내가 묻습니다. 깜깜해진 이후인 저녁 6시 도착예정이란 말을 안했으니 당연히 궁금했겠죠.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무조건 안된다고 할게 뻔해서 일단 말을 안 했었습니다. 그냥 '만약을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에겐 '8시간'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1시간 반'의 긴 여정이므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 25일 새벽 다섯시에 일어났습니다.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기대했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런데 나무가지가 부러질듯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탐스런 함박눈이 하늘하늘 내리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쨌든 예정대로 6시 반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시간에 하늘이 환하게 벗겨지던 LA와는 달리 여전히 깜깜합니다. 깜깜한 새벽 영하 8도 거센 눈보라.. 따뜻한 LA에서만 16년 살던 우리에겐 너무 혹독했습니다. 몇발작 걷다가 도저히 안될거 같아서 철수했습니다. 하늘이 벗겨지기 시작한 6시 50분에 다시 나왔습니다. 하지만 똑같습니다. 다시 철수했습니다.ㅎ 그리고 7시에 다시 나왔습니다. 여전히 어슴프레하고 눈보라도 거셉니다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일단 무조건 트레일 출발지로 걸어갔습니다.
Trailhead, 그랜드캐년 Rim의 끝자락이라 서있기조차 힘들정도로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칩니다. 이런 상황에 트레일에 들어선다는 건 위험할 거 같았습니다. 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눈보라를 피할 곳이라곤 화장실 앞밖에 없습니다. 20분정도 지나자 드디어 하늘이 완전히 벗겨지고, 바람은 아직 불지만 눈은 잠잠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곤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자 출발하자.. 그런데 아내가 망설입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고,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냐고. 제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서 눈이 안쌓인데다가 이런 눈은 미끄럽지도 않아. 그리고 사람들이야 곧 오겠지’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망설입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이 한명이라도 오고 난 후에 출발하잡니다. 하지만 계획보다 한시간이 늦어져있는 상태라 억지로 우겨서 일단 출발했습니다.
내리막 출발 삼십초만에 제가 공중으로 날아 뒤로 자빠졌습니다. 눈에 덮힌 속길이 얼음이었던 겁니다. 배낭을 지고 있던 덕에 큰 충격은 면했는데, 뒤로 자빠진채 밑으로 죽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지릅니다. 다 늦게 웬 비명? 제가 벼랑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줄 알았답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뒤에서 볼땐 그렇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 트레일 절대불가’
미끄럽지 않다는 제 큰소리가 헛소리였음이 증명되었으니 아내의 반대가 몹시 완강합니다. 일단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수만 벌써 몇번째입니까^^ ‘신발에 장비를 끼우고 가면 괜찮아’ 아내를 억지로 끌고 crampon ('아이젠'은 일본식 엉터리 용어)을 사서 끼우고 다시 출발지로 왔습니다. ‘이걸로도 미끄러우면 진짜 철수하자’ 이렇게 해서 겨우 출발했습니다. 시간은 이미 8시.. 트레일에 들어서니 아까와는 달리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들이 보입니다. 처녀설을 다른이들에게 빼앗겨 아쉬웠지만,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안도감은 있습니다. 밑으로 보이는 길에 앞서간 사람이 보입니다. 3명이 우리 앞에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5명이 우릴 추월해서 총 8명이 우리 앞에 갑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더 이상 우리 뒤에 아무도 오질 않습니다. 그날 당일치기로 내려가는 사람은 총 10명이었던 겁니다. '호젓함'의 극치입니다.
예정보다 한시간반이나 늦어졌으니 산술적으로 콜로라도 강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보다 조금 짧은 Plateau Point로 목적지를 변경했습니다. 그곳은 왕복 7-9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Indian Garden까지만 갔다가 돌아오자고 해뒀습니다.
(주황색 점 찍은 부분이 Plateau Point입니다)
캐년밑은 바람이 훨씬 덜 불어 살을 에는 추위는 없습니다. 길이 좀 미끄러웠지만 크램폰을 끼우고 있는데다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아 걸을만 합니다. 슬슬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그랜드캐년의 숨막히는 절경때문입니다. ‘포기했으면 어쩔뻔 했어. 이거 못볼뻔 했잖아..’
얼마간 걷다가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밤새 캠핑을 하고 올라오는 길이라는데 아가씨 두명입니다. 잉카트레일도 그렇더니 이곳 역시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많습니다. 한시간쯤 내려오다보니 넘어졌을때 충격때문인지 허리 어깨 발목이 뜨끔뜨끔 아프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프다고 말하면 바로 올라가자고 할까봐 꾹 다물었습니다. 눈길이 거의 없어지자 크램폰을 벗고 속도를 높혔습니다.
인디언 가든에 10시 반에 도착했습니다. 미끄러운 눈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30분정도 빨리 온 겁니다. 인디언 가든.. 참 예쁩니다. 이 지역의 유일한 오아시스인것 같은데 겨울임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국 늦가을의 모습입니다. '시간도 있는데 끝에 까진 가봐야지? 휴식없이 바로 간다..' 아내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맞장구를 칩니다. 잠시 후 갈림길.. 오른쪽은 Colorado River, 왼쪽은 Plateau Point.. 콜로라도 강쪽으로 모험을 한번 걸어볼까 잠시 갈등했지만 바로 마음을 잡고 왼쪽으로 들어섰습니다. 안전 최우선입니다. 경사가 거의 없는 길이라 거의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하다는 High Desert.. 정말 대단한 날씨입니다. 비가 와서 비옷을 꺼내 입을라치면 해가 납니다. 썬글라스를 꺼내써야 하나 고민을 할라치면 눈이 날립니다. 몸에서 땀이 나 속옷을 벗을라치면 갑자기 찬바람이 휘몰아쳐 오히려 겉옷 하날 더 껴입게 합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미친 날씨입니다.
그러다 올려다 본 그랜드 캐년.. 위에서 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압도적인 그랜드캐년입니다. 하지만 오래 즐길 여유는 없습니다. 해떨어지기 전에 다시 올라가려면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걸어 Plateau Point에 도착했습니다.
난생처음 그랜드캐년을 봤을때의 그 헉- 하던 숨막힘과 비슷합니다. 현실같아 보이지 않는 협곡과 콜로라도 강 위로 비가 오다 해가 뜨고, 눈보라가 치다 무지개가 뜹니다. 워낙 압도적이라 공포감마저 느껴집니다. 옛 인디언들이 이 무시무시한 자연을 숭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습니다.
‘올라가서 대가리 박을께’ 압도적인 절경에 취한 아내의 입에서 스스로 나온 반성문입니다. 이거 못봤으면 어떡할뻔 했어.. 진눈깨비와 바람을 피해 돌밑에서 먹는 차가운 sub 샌드위치 맛이 일품입니다.
날씨가 점점 더 변화무쌍해집니다. 거짓말처럼 '왼쪽엔 해가 비치고 있는데 오른쪽엔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제가 윗 사진의 돌지붕아래 오른쪽 끝에 앉았더니 왼쪽은 땅이고 오른쪽은 벼랑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말같은 현상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다 폭풍우가 몰아치다 갑자기 커다란 무지개가 걸립니다. 몸이 날아갈 듯 바람속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무지개는 안나왔습니다. 성경속에서나 나올법한 미친 기후, 게다가 그 희한한 곳에 사람이라곤 우리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특별했습니다.
떠나기 아쉬워 그곳에 뭉개다가 출발이 늦어져 인디언가든에 12시 30분쯤에야 도착했습니다. 해가 5시 반에 떨어지니 5시간안에만 올라가면 됩니다. 올라갈 길을 보니 까마득합니다.
힘듭니다. 일단 길이 지루해서 힘듭니다. 잉카는 산과 산들을 크게 크게 가로질러 가기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지만, 이곳은 캐년의 한쪽 벽만을 지그재그로 올라가기 때문에 좀 지루합니다. 또 몸이 지친 이후의 거꾸로 등산이라 힘듭니다. 잉카트레일은 3박4일동안 45km를 걷지만 이 그랜드캐년 트레일은 하루에 21km를 걷습니다. 하루 걷는 거리로만 따지면 잉카보다 더 강행군입니다. 게다가 이곳도 나름 고산지역입니다. 내려오던 중 중간에 물병을 보고 실감했었습니다. 물병이 이렇게 확 쪼그라들어 있습니다.
출발지 고도가 2,100m 정도이니 고산증을 느끼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근육과 심폐활동에는 좀 부담이 되는 고도인 겁니다. 물론 잉카때처럼 숨이 턱턱 차지는 않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잉카보다 훨씬 수월합니다.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4시밖에 안됐습니다. 해가 질때까지 한시간반이나 남은겁니다. 우리가 우리 체력을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아 띠바 콜로라도 강으로 갈걸.. 하는 아쉬움이 잠시 있었지만 곧 잊었습니다. 콜로라도강으로 갔었다면 그랜드캐년 바닥을 찍었다는 성취감은 있었겠지만 Plateau Point에서의 숨막히는 절경을 놓쳤을테니 말입니다.
아내는 잉카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좋았다고 여기는 듯도 합니다.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더군요. 하긴 저도 일부 동의합니다. 페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게 잘 관리되어 있어서 정말 쾌적했습니다. 또 '안전 걷기'에만 집중하느라 경치를 볼 겨를이 전혀 없었던 잉카때와는 달리 이곳에선 경치를 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겁니다.
크리스마스 새벽, 눈 내리는 그랜드캐년..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비록 시간쫓김과 추위와 눈보라와의 싸움이 좀 있었지만 모든 것들을 깨끗이 잊게할 만큼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랜드캐년을 올려다보고, 협곡아래 콜로라도 강을 바로 발밑으로 내려다보는 그 까무러칠듯한 경험을 어디 쉽게 해보겠습니까.
그랜드캐년 트레일.. 강력히 권합니다. 다만 1박2일로 하십시요. 충분히 시간여유를 가지고 Plateau Point를 들렀다가 다시 Indian Garden으로 돌아나와 Colorado River까지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바닥을 찍었다는 그 성취감도 아마 대단할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하루 자고 그 다음날 천천히 올라오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취감을 맛보러 한번 더 도전?
아직은 '글쎄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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