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얘기

합창예찬 - 남격하모니

남자의 자격 하모니
‘밀림의 왕자 레오’ 이후 처음으로 다음편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던 프로그램, 지난 편을 지우지 않고 보고 또 보던 프로그램, 두달 내내 즐거움을 주다가 벅찬 감동으로 막을 내린 ‘남자의 자격 하모니’.

푹 빠져있었다. 아니 거의 함몰되어 있었다. 하모니를 본 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보면 비몽사몽간에 그들과 합창연습을 같이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옛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같이 어울리다 보면.. 그곳이 남격 하모니인지 삼십년전 하니브로인지 흥분과 감동.. 희한한 경험이었다. 남격 하모니는 그렇게 가슴 아릿한 하니브로 시절로 우릴 돌려보내 맘껏 웃기고 울렸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댔었다. TV프로그램의 후유증을 앓아보긴 처음이었다.

그 감동은 비단 하니브로의 추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함께 가슴 뭉클뭉클하던 그 경험, 남자의 자격 하모니가 우리에게 준 그 감동은 도대체 뭐였을까? 합창이 대관절 뭐길래?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화음이 없는 음악 - 국악
예전에 대금을 부는 분과 크로스오버를 한번 해보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대금과 클래식기타 혹은 대금과 키보드로 해보기로 했다. 미리 연습하기로 했던 곡은 서편제의 천년학. 기타와 키보드를 챙겨서 대금 하시는 분의 집에 갔다. 같이 맞춰봤다. 처음이지만 썩 괜찮았다. 옆에서 듣던 분들도 모두 칭찬을 했었다. 그러나 대금 연주자, 십분도 안되어 그만하자고 하신다. ‘맛이 안나’신단다. 국악의 생명은 연주자에 따라 멋대로 늘이고 떠는 ‘요성’과 ‘농현’인데, 합주에선 그걸 하지 못하니 국악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나라 국악, 아무리 들어보려 해도 듣다 보면 금세 지루하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국악에 ‘화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각 자체가 서양음악에 익숙함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여러 악기가 모여서 연주하는 국악 관현악도 듣기에 지루하고 거북하다. 악기만 여러 개일 뿐 역시 화음이 없기 때문이다. 멜로디도 재미없고 리듬도 지루한데 거기에 화음마저 없으니, 아무리 우리것이 좋은 거라며 참고 들어볼래야 우리의 인내심이 그리 오래 버텨주지 않는 것이다.


절제가 없는 합창 - 솔리스트 앙상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성 성악가들이 모여 함께 노래를 하는 ‘솔리스트 앙상블’이라는 합창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남성 성악가들이 총 망라된, 면면으로만 보면 대한민국 최고의 합창단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다는 합창.. 이거 듣기에 굉장히 거북했다. 심하게 말하자면 거의 ‘소음’ 수준이었다. 노래의 달인들끼리의 합창인데 왜 그렇게 엉망이었을까?

절제가 없고 조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합창의 생명은 자기절제와 남들과의 조화가 생명인데 솔리스트 그들이 하는 합창은 한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여러 개의 독창회였기 때문에 그냥 시끄러운 소음인 것이었다.


합창은
대학생이 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미팅이나 연애가 아니었다. 바로 그룹사운드였다. 산울림과 대학가요제 그리고 기타에 푹 빠졌었던 내게 그룹사운드는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중의 하나였었다. 근데 연이 잘 닿질 않았다. 멤버를 모집하는 공고라도 있으면 찾아가려 했는데 모집공고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새로 결성을 하자니 사람도 없고 경험도 없고. 그러다 우연히 제일 먼저 찾아 들어갔었던 써클은 생뚱맞게도 클래식기타반이었다.

하지만 정적이고 완고한 교육과정에 염증을 느끼고 일주일만에 뛰쳐나왔다. 나와 똑 같은 이유로 투덜대던 일렉기타 하던 친구와 함께. 하루는 자기네 서클 집회에 한번 놀러가보자는 또 다른 친구의 꼬임에 빠져 그 서클의 집회에 가보게 되었다. 합창단이었다. 그룹사운드를 꿈꾸던 두 소년이 생뚱맞게 합창단 연습집회에 구경을 가게 된거다.

합창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해보겠다는 생각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는데, 합창연습에 한번 끼어보곤 마치 마법에 홀린 듯 둘 다 그 써클에 덜컥 가입을 해버렸다. 나중에 하나는 그 서클의 회장이 되고 또 하나는 지휘자가 되는데.. 도대체 합창의 매력이 뭐였길래 그룹사운드를 꿈꾸던 날탱이 소년 둘이 그렇게 골수 합창 매니아가 되었을까?

얼떨결에 끼이게 된 첫 합창연습, 젤 쉬워보이는 베이스를 하겠다고 했었다. 지루하디 지루한 파트연습이었다. 게다가 베이스파트, 재미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낮은 베이스 음들의 연결.. 괜히 왔다싶었지만 데리고 온 친구의 얼굴을 봐서 몇시간만 참자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그 인내력마저 거의 한계에 이르렀을 즈음 지휘자가 모두 모이라고 한다. ‘자 한번 맞춰보자’ 그게 어떤 곡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난생 처음 합창단에 속해 연습했던 베이스 파트를 지휘에 맞춰 불렀다.

그 때 아주 희한한 경험을 했다. '화음'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그래서 합창에 빠졌었다.


합창은 정직해야 한다
혼자서 부를 때는 약간의 오차는 듣는 사람에게도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화음을 맞추는 합창에선 다르다. 비록 1/10음의 미세한 오차라 할지라도 합창에선 그게 아주 고약한 잡음이 된다. 내 음정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을 때 바야흐로 화음의 아름다움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악보대로 음을 내는 것' 이것이 합창의 시작이다.


합창은 절제하고 배려해야 한다
합창은 서로 다른 음을 내는 사람들이 만나 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내 소리를 절제하고 다른 소리를 배려해야만 한다. 특히 멜로디를 끌고 가는 소프라노와 테너에게 중요하다. 자기 혼자 음악에 취해선 안되고 '내 목소리를 적절히 절제하고 다른 이의 소리를 배려'해야 한다. 그래야만 ‘화음’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합창은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너무 감춰서는 안된다. ‘남을 위해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또 합창이다. 화려한 소프라노나 테너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알토와 베이스에게 중요하다. 얼핏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것 같은 단조로운 음들이지만, 이 알토와 베이스가 있어야 소프라노와 테너가 빛을 발한다. 서로의 음이 잘 들릴 수 있도록 내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그러면서 다른 이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절제하고 배려할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읽으며, 서로의 음을 들으며 노래를 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화음’이 된다. 


합창은 조화하고 복종해야 한다
정직하기만 해서도 안되고, 절제만 해서도 안되고, 소통만 해서도 안된다. 그것들이 모두 함께 조화되어야만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정직과 절제, 소통이 조화되어 큰 울림을 만들어 내는 음악이 바로 합창이다. 하지만 과연 그 적절한 접점이 어디인지 노래하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합창엔 지휘자가 있다. 아무리 개개인들이 절제와 배려와 소통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걸 누군가가 조화시키지 못하면 역시 소음이기 때문이다. 얼만큼 정직해야 하고, 얼만큼 절제해야 하며, 얼만큼 소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며 객관적으로 조화시키는 사람이 바로 지휘자다. 그래서 합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자의 역량이며 그걸 갖춘 지휘자에게 개개인들은 절대 복종한다.

내 비록 화려하지 않은 음을 노래하고 있지만 내 소리가 울려나가면서 다른 이의 소리를 화려하게 만듦을 경험한다. 이게 합창이다.


합창이 필요한 세상
합창을 하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정직과 절제의 미덕, 소통과 조화의 중요성을 배운다. 전체를 위해 리더에게 복종하는 법도 배운다. 모여 노래하는 합창이 이렇게 인간도 성숙하고 사회도 성숙할 수 있는 좋은 과정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상은 '한놈도 빠짐없이 발맞추어 나가자'는 국악이며, 잘난 사람들만 너무 많은 솔리스트 앙상블이다. 정직하지 않아야만 성공하는 세상, 나만 배려하고 남은 절제시키는 사람들, 소통과 조화를 배운적이 없는 지도자, 그리고 복종할줄 모르고 대드는 사람들 투성이의 세상이다.

전국민이 남격 하모니에서 받은 벅찬 감동은 아마 아름다운 세상을 그곳에서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정직한 소리를 내고, 나를 절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소통하는 지휘자 그리고 그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세상.

상식이 통하고 페어플레이가 통하는 그 세상, 모든 이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그 세상을 보고
가슴이 벅찼던 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