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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학여행? 이게 아직까지 있어?

중학교 1학년때 경주에서 보이 스카우트 잼보리(캠퍼리?)대회가 열렸었다. 캠프를 차렸던 곳은 큰 숲과 잔디가 있는 어떤 곳(우린 그냥 ‘황성옛터’라고 불렀었다)이었는데 4박5일정도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하루 하루, 매 시간시간이 즐거웠었다. ‘기능장’이라고 하는 걸 따기 위해 하루를 거의 다 보냈었는데, (예를 들면 ‘매듭’ 교육이 열리는 곳에 가서 그 교육을 받고 실습을 한 다음 테스트에 통과하면 기능장을 수여하는 형식) 그 기간동안 무려 스무가지의 기능장을 땄었다. 그 확인증을 가지고 동대문에 있던 보이스카웃 매장에 가면 그 기능장 표식을 살 수 있다고 했었다. 선배들 어깨에 달린 기능장 표장을 부러워했던 우리들은 그 기능장 취득에 열을 올렸다.

(왼쪽 두번째가 우리 조장 3학년 형이다. 그때엔 어른처럼 보였는데 중학교 3학년이다 ㅋ)

밤이면 매일 열리던 커다란 캠프파이어도 장관이었지만 그거말고도 이곳 저곳 볼게 참 많았다. 모두가 똑 같은 보이스카웃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누가 어디 소속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고 흥겨웠다. 아이들 모아놓고 피리를 불어주던 선생님, 기타를 치면서 싱어롱을 하던 선생님, 다른나라 민요를 틀어놓고 민속무용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 지원자들 모아서 씨름대회를 펼치던 선생님.. 밤시간 그런곳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우리 선생님이 정해놓은 취침시간을 넘겨 들어오기 일쑤였다.

살금살금 캠프로 돌아오면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에게 기합을 줬었다. 중학교 2학년짜리들이 1학년들에게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러나 그 선배들도 빨리 자고 싶었던 듯 5분도 지나지 않아 해산했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러고 그 다음날도 또 그러고, 이제는 늦게 와도 기다리는 선배도 없었다.

참 좋은 경험들을 했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아직도 그때의 그 설레임과 두근거림들이 조금은 느껴진다. 마지막 날 선생님이 구슬프게 부르던 ‘황성옛터’ 그 노래는 어린 아이들의 심금을 ‘진짜’ 울렸었다. 경주와 신라에 대해 참 좋은 이미지를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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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대가리가 좀 굵어서 그 경주에 또 갔다. 이번엔 수학여행이다. 이때 남은 기억은 딱 두가지다. 당시 아버지께 기타를 뺏겨서 손가락 굳은 살이 하나도 없다가 수학여행가서 갑자기 기타를 너무 많이 치느라 벌창이 나버린 내 왼손가락들과, 사람을 위한 식탁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던 개떡 같은 반찬.. 그외엔 술마시고 담배 피우다 걸려서 선생에게 얻어 터지고, 다른학교 애들과 기세싸움 벌이고.. 어지럽게 ‘일탈’하던 기억말고 도대체 그 수학여행에선 남는게 없다. 경주와 신라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와 추억마저 망쳐버렸다. 그지같던 여관, 그지 같은 밥, 그지같던 선생들, 그지같이 피곤하게 끌고 다니던 일정, 그냥 한마디로 그지같던 수학여행이었다. 선량한 학생들중 상당수가 이때 분위기에 휩쓸려 술과 담배를 배운다.

(졸업앨범에 넣을 이 사진 한장 박겠다고 간 여행)

이 쓰레기같은 수학여행,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혹시 일제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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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메이지 유신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10월 유신이 나왔다. 그가 행했던 정책의 상당부분에 메이지 유신의 잔재들이 묻어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메이지 이전 시기의 일본인들은 중앙에 있는 국가의 존재를 잘 몰랐다고 한다. 그저 각 지방의 봉건 권력자들만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근대국가체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민중들을 중앙집권 체제로 편입시키려면 뭔가 특별한 방식이 필요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교를 매개로 민중들을 국가와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행하기 시작한 게 바로 학예회, 운동회, 소풍, 수학여행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 학생과 학부모를 동원하여 국가의 체체를 인식시켜 나갔다. 모든 행사 중에는 천황의 칙어를 낭독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민중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황중심의 권력구조에 편입되고 있었다. 김일성의 집단체조와 아주 비슷하단 얘기다.

이 일본식 학교문화가 한국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문화의 대부분은 일본이 심어놓고 간 것들이다. 나는 졸업할때까지 일제가 강제로 입히던 검은 교복을 그대로 입었었다. 강제유도하던 모든 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들이는 순박한 사람들. 아는 자들이 알려주지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학예회나 운동회가 나쁜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행사들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약간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에서 왔으니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학교문화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학교문화만큼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이다. 국가나 최고권력자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당연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요즈음 국민들의 정서는 그런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강제적인 동원은 이미 학교바깥에는 없다. 학교에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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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등학생 아이들이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집단으로 매춘을 했다고 한다. 과거 우리들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면 이는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리때보다 훨씬 대가리가 까진 요즈음 아이들의 일탈행동은 단지 매춘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마약에 손을 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들이 이런 것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수학여행은 계속되고 있다. 이거 왜일까? 수학여행이 계속 필요한 이유를 ‘교육적 차원’에서는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정권이 국민들을 계도하기 위해 학생들을 집체동원하는 것일리도 없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답은 금새 나온다.

예전에 수학여행하면 무조건 경주였다. 왜 경주로만 갔을까? 시즌엔 경주 전체가 고만고만한 고삐리들로 인산인해였다. 이거 이상하지?

학교와 숙박업소들간의 유착관계 때문이었다. 경주로만 수학여행이 몰리던 이유는 단 하나, 선생들과 숙박업소 사장들간의 검은 돈거래였다. 여관에서 밤에 한두명의 선생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은 나머지는 접대를 받으러 여관밖으로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선생들이었다. 검은 돈을 교장이 다 쳐먹었는지 선생들과 나눠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들을 우린 선생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요즈음 선생들은 좀 깨끗해 졌을까? 요즈음 수학여행은 한 술 더 떠서 해외로 나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생들과 여행사들의 유착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돈거래만 있는게 아니라 해외로 나가니 분명히 갖은 형태의 접대가 뒤따를 것은 뻔한 노릇. 띠바, 선생들은 오히려 더 더러워졌다. 검은 돈 받고, 접대 받는 재미에 선생들은 학생들을 이끌고 굳이 해외로 나간다. 접대에 한눈이 팔린 선생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이 매춘을 하든 마약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가 보다. 물건 도착했습니다. 몇갭니까? 전부 450갭니다.. 아이들 머릿수를 이렇게 셀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선생들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이 워낙 뿌리깊어서 좀 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요즈음 공교육의 붕괴는 이런 더러운 선생들 탓이 제일 크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배려나 성과는 전혀 없고, 아이들에게 해악만 끼치고 선생들의 쾌락을 위한 수학여행, 이거 계속 해야 하나? 


혹시 수학여행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는 차원에서 학부모들이 펼치는 배려라면..
차라리 봉투로 주고 받아라.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 써놓고 보니 대다수 선량한 선생님들의 입장을 간과했습니다. 이런 추태는 일부 보직교사들과 극히 일부인 나쁜 교사들만의 만행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