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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NIT에도 밀린 WBC

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정리를 하고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갔다. 이곳 시간으로 8시부터 시작하는 WBC 한일전 야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후딱후딱 씻고 저녁을 먹으면서 TV 에 시선을 고정했다. 근데 이상하다. 한창 진행 중인 미국 대 푸에르토리코의 경기가 방송되지 않고 있었다. ESPN ESPN2 그리고 스포츠를 방송하는 채널들을 여기저기 돌려봐도 야구를 중계하는 곳은 없었다. 알아보니 오늘 경기들은 MLB 채널에서 방송한댄다. 띠바 나한텐 그 채널이 없다. 유난을 떨면서 일찌감치 집에 와서 응원준비를 마쳤는데 경기를 못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WBC 경기를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중계해 주던 ESPN에선 지금 무슨 중계가 나가고 있는건가?

‘NIT’라는 미국 대학농구 토너먼트가 중계되고 있었다. NIT라면 대학농구 최종 64강 토너먼트(3월의 광란)에 나가지 못한 팀들중에 다시 64팀을 가려서 하는 패자들의 토너먼트다. NIT(National Invitation Tournament) 이지만 사람들은 이 토너먼트를Not Invited Tournament, Not Important Tournament, Nobody's Interested Tournament, National Insignificant Tournament, Not In Tournament 라고 여러가지로 놀려 부른다. 그만큼 ‘3월의 광란’에 비해서 인기가 현저히 떨어지는 토너먼트다. 아예 이 NIT 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근데 이 NIT 중계때문에 WBC 가 밀렸다. 'In the U.S., the biggest baseball rivalry is Yankees-Red Sox. Around the rest of the world, it could be Korea-Japan'라고 띄워주던 한국-일본전만 밀린걸까? 아니다. 미국이 4강에 진출하느냐 떨어지느냐가 걸린 중대한 경기인 미국-푸에르토리코의 경기도 NIT에 밀렸다. 어제가 혹시 이 NIT의 개막일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NIT의 불쌍한 처지를 가엾게 여겨 ESPN이 개막전들만이라도 중계해준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명색이 국가 대항전인 WBC가 느닷없이 대학농구 66위부터 129위까지 팀들이 벌이는 후진 토너먼트 NIT에 밀렸다.

집엔 인터넷도 없고 라디오도 없으니 ESPN 자막에서 일이십분마다 차례가 오는 WBC 소식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리드하다가 이긴 경기다. 직접 봤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 띠바. 오늘 아침, 어제 경기의 하이라이트라도 보려고 아침 일찍부터 ESPN에 매달려 있었다. 근데 어제 NBA 경기들, 경기중에 셀틱스 감독이 퇴장당했다는 소식, NHL에서 한 골리가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소식.. 기다려도 기다려도 WBC 보도는 없다.

어제 미국팀이 대 역전승을 거뒀다. 9회말까지 5대3으로 뒤지다 막판에 6대5로 역전하는 드라마틱한 경기였는데도 이 소식 역시 별로 뉴스거리가 아닌 모양이다. 이 소식도 삼십분 이상을 기다려서야 겨우 나왔다. 미국의 응원단,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삼십명씩 모여 성조기 흔드는 게 다다.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일반 경기엔 4-5만명씩 모여드는 미국인들인데 국가대표팀의 경기엔 이렇게 무관심이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한일전은 아예 하이라이트조차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그냥 출근했다.


미국 국가 대표팀의 경기에 미국인들은 왜 이리 무관심 한걸까? 꼭 이겨야만 4강 진출이 되는 그 중요한 경기에, 1차전에서 치욕의 콜드게임패를 당했던 푸에르토리코와의 그 설욕전에, 9회까지 5대3으로 뒤지다가 9회말에 역전을 시켜버린 그 드라마틱한 경기에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관심이 없는 걸까? 우리나라 같았으면 방송 3사가 나란히 9시 뉴스까지 뒤로 밀면서 중계를 했었을 법한 이 경기에 미국인들은 어쩌면 이렇게도 관심이 없는 걸까? 다저스의 경기, 레이커스의 경기, 킹스의 경기엔 수만명이 운집해서 열렬히 응원하는 미국인들이 정작 미국 국가대표팀의 경기엔 이토록 무관심한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미국이라는 자기나라는 이미 지구상 어느 국가와도 경쟁따위를 하는 그런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는 우월감일까. 미국이란 나라는 하나의 국가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전체 세계’라는 자신감일까. 메이저리그에 오기 위해 혈안이 된 선수들의 경연장에 불과한 WBC에서 그까짓 국가대항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오만함일까. 조국팀을 '쓸데없이' 열렬히 응원하는 많은 이민자들에게 보내는 조롱의 메시지일까.  


경기장에서, TV앞에서 목이 터져라 조국팀을 응원하는 이민자들을 머쓱하게 만드는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 의아스럽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일면 부럽기도 하다. 미국이란 나라.. 하지만 난 그런것과 관계없이 앞으로도 여전히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