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메리카

하늘지기의 꿈 1 - 다시 꾸다

새벽 다섯시 오십분, 아직 어둠이 깔려있는 그 시각, 출발지에선 교관이 이미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잠 잘 못잤지요?’ 인사를 하자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실제로 잠을 잘 못 잤다. 십수년전 제주도 한적한 바닷가에서의 그 비행이 떠올라 밤새 뒤척였었다. 드디어 하는구나.. 그것도 그냥 체험비행이 아니라 본격 교육을 받는 것이고 얼마후면 단독비행을 하겠구나.. 젤 먼저 어디로 갈까? 샌프란시스코까지 해안을 따라 올라가 봐야겠다..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같이 가게 된 또 한 분, 내 훈련동기 되시는 분, 미주 한인 Harley Davidson Club 회장이시란다. 떼거리 지어 도로위를 몰려 다니는 오토바이 동호회 회장이라면 양아치들의 수괴 아닌가.. 근데 이 회장님.. 39년생이시라고 하는데.. 파격 패션에 힘찬 목소리와 몸짓..일흔을 목전에 둔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늙어서 저렇게 살자..’ 다짐했다.

작은 트레일러를 붙이고 그위에 ULM을 싣고 가는데 달리는 내내 트레일러가 흔들린다. 바로 뒤에 붙어가는 나는 아슬아슬하다. 저게 갑자기 뒤로 굴러 떨어지면 어느쪽으로 피해야 하나.. 조금씩 거리를 더 벌리면서, 미리미리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따라갔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지리하고 지리한 사막을 달리고 달리기를 두시간 반쯤.. 왼쪽 멀리 먼지구름이 뿌옇게 덮은 곳이 보인다. 저곳이구나. 우리가 가는 El Mirage.. 생각보다 더 넓었다. 그로부터도 20분 정도를 더 달려서야 반대쪽 끝 진입구에 도착했다. 이렇게 넓을 수가.. 느낌상 여의도 광장의 오천배정도? 영어로만 desert일뿐 모래사막은 아니고 황토흙이 오랜세월 단단하게 굳어진 광활한 흙먼지 평야였다. 나무 한그루 없고 풀 한포기 없는 삭막한 땅. 하도 넓어 반대쪽 끝은 거의 지평선에 가까운 땅.

그곳에 진입하니 TV에서만 보던 온갖 것들이 뒤엉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오토바이, 사륜오토바이, 죽음의 레이스에서 본 이상하게 생긴 찝차, 난생 처음보는 이상스런 것들.. 혼자 달리는 놈, 여럿이서 경주를 하는 놈.. 대여섯살 먹어보이는 쪼그만 놈부터 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여자 남자.. 차선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곳에서 그들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달리고 있었다. 세이들 참 재밌게 놀고들 있다.

그 사이를 조심스레 뚫고 지나갔다. 한켠에는 사람들이 타고 온 수많은 RV와 SUV들이 즐비했다. 우리 ULM이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들은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그게 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거라던 꿈은 바로 깨졌다.

한쪽에 자리를 잡자마자 교관이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열한시부터 돌풍이 불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시작하고 끝내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열시에 다가가고 있다. 오는 길 맥도날드에서 회장님 일장훈시가 너무 길었었다. 트레일러에서 기체를 손으로 들어 내리고(원래는 쉽게 내리는 기구가 있다는데 깜박하고 안가져 왔댄다) 한쪽에 세워두고 SUV 지붕위의 날개를 떼러 가려는 순간이었다. 교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이거 큰일났네..’
‘왜요?’
‘키를 안 가지고 왔는데요..’
‘….’

머? 그 새벽부터 서둘러서 이렇게까지 왔는데 키를 빼놓고 안 가지고 왔다고? 이게 말이 되냐? 비행하러 온 자가 시동 걸 키를 안 가지고 와? 난감 허탈도 이런 경우가 없다. 밤새 뒤척이면서 새벽에 일어나 그 먼길을 달려 왔는데 시동 키가 없다니.

‘할 수 없죠 뭐. 그냥 가야겠네요..’
‘아녜요. 뭐든 열쇠처럼 생긴거로 다 해봅시다. 이게 복잡한 열쇠가 아니거든요’

다행히 할리데이비슨 회장님의 키뭉치가 상당히 크다. 그중에 맞는게 있을 법도 하다. 크기는 맞는데 작동이 안되는 걸 돌리길 오분여쯤.. 키가 돌아갔다. 와 된다.. 근데 이 교관 ‘되네요’ 하곤 키를 빼버렸다. 아니 저놈이.. 회장님이 놀란다. ‘아니 그걸 왜 빼?’ ‘방전되거등요’ 역시 다시 하려니 또 안된다. 저 띠바가 겨우 된걸 왜 빼내고 지랄이야.. 또 아주 한참을 고생하고서야 겨우 키가 돌아갔다.

‘자 부지런히 세팅합시다. 이거 시간 좀 걸릴거예요. 숙달된 사람이 없으니’

예전 제주도에서 기체 조립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엔 젊은 남자들이 대여섯명. 쉽게 끝났었다. 근데 이번엔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노인네는 물러서게 하고 교관과 나 둘이서 해야한다. 오른손 손톱을 신경쓰면서 일을 하려니 힘이 더 든다. 날개에 살을 끼우는 일..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최대한 잡아당겨 끈으로 감아 쥐어야 하는데 그 끈이 고무줄이 아니다. 오로지 힘으로 당겨 살의 끝을 손가락으로 버티면서 매듭을 걸어야 한다. 손톱 부러질까 조심하면서 하려니 손가락 끝이 너무 아프다.

‘왜 그렇게 쩔쩔매요? 남자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손톱 부러지면 안되거등요..’
왜 손톱이 부러지면 안되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냥 피식 비웃는다. 너무 한심한 놈으로 생각될까 굳이 설명을 했다. ‘기타를 치거든요 제가..’ 대답도 없다.

시작한지 5분도 안되었는데 손이 아프고 팔이 아프다. 겨우 날개에 살을 다 끼웠을 뿐인데 손가락이 전체가 시뻘겋고 심하게 아픈게 마치 망치로 맞은 듯하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회장님은 구경만 하고, 교관은 시키기만 하고, 일은 전부 다 내가 한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어? 바람이 부네..’ 교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바람이 불면 비행이 훨씬 터프해 진단다. ‘터프해 진다니요?’ ‘많이 흔들리고 콘트롤하기에 힘이 많이 든다는 얘깁니다’ 터프해지면 더 재밌겠는데 뭘.. 고생은 당신이 하는거지 우린 더 재밌지 ㅋㅋ

근데 바람이 부니 기체를 조립하는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펼쳐진 날개 지탱하랴 바람과 싸우면서 무거운 거 들고 조립하랴.. 할 수 없이 회장님도 나서고 야채도 거들었다. ‘여기가 이 정도면 위에 올라가면 바람이 상당히 쎄겠는데..’ 교관이 계속 바람 걱정을 한다.

본체를 세우고 그위에 날개를 얹어 조립하고.. 이거 여간 힘든게 아니다. 회장님은 이리 저리 왔다갔다만 하시지, 교관은 뭐든지 다 나한테 시키지.. 일의 내용을 모르니까 괜한 힘만 쓴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용을 쓰지만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갑자기 엉덩이 부위에 쥐가 내려 서 있기조차 힘들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교관의 눈을 피해 한동안 펄쩍거리다가 겨우 통증이 가라앉았는데 이제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손은 손대로 아파오고 팔은 마비가 된 듯 저려오고 다리는 떨리고..

‘어지간히 이런 거 못하십니다.. 근데 이것도 다 교육이예요. 직접 다 해봐야 합니다. 생명이 달려있는 일이예요’ 그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 생명이 달려있는 일 아니든가. 그래도 쫑코가 좀 심하다. 맨날 하는 당신하고 몇십년만에 하는 나하고 같수? 띠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삼십분이 훌쩍 넘어서야 세팅이 겨우 끝났다. 비행도 하기전에 벌써 지쳐버렸다. 하지만 상관 없다. 이제 올라가면 그저 아래로 경치 구경만 하면 되니까..

‘바람이 더 쎼지기 전에 빨리 합시다’ 교관이 인터컴을 준비한다면서 차안을 들락거리더니.. ‘어? 밧데리가 없네?’ 머가 어째? 비행중 앞뒤 사람이 교신할 인터컴의 밧데리가 없댄다. ‘그냥 서로 소릴 질러야 겠는데요..’ 참 우리 교관 가지가지 하신다.

일단 체험비행을 하러 오신 회장님부터 서둘러서 태우고 비행을 시작했다. 15분쯤 비행을 하고 내려왔다. ‘윗쪽 바람이 쎄서 힘드셨죠?' 교관의 말에 ‘난 재밌던데’ 회장님이 응수를 한다. 다음은 야채차례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이렇게 폼나게 이륙을 했지만 15분쯤 후에 착륙한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멀미를 했어’ 바로 차로 가더니 뻗는다. ‘바람이 쎄서 기체가 많이 흔들렸을 거예요’ 교관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해준다. 자 다음은 드뎌 나다. 오늘의 유일한 정규 교육생.

바람이 점점 심하게 불어 아예 땅에서부터 기체가 흔들린다. 안전벨트를 묶는데 은근히 겁이 난다. 이렇게 바람이 쎈데 이거 올라갔다가 추락하는거 아닐까?

‘원래 이정도 바람이면 안 올라가는데.. 예전에 비행경험도 한번 있으시다니까.. 올라가면 기체가 많이 흔들릴거예요. 위험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전 괜찮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첫마디가 걸린다. 뭐? 이 정도 바람이면 원래 안 올라간다고?... 띠바
드디어 15년만의 비행. 기체가 땅을 박차고 올랐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얼마나 높은지 감이 안온다. 멀리 아래로 보이는 흰 색깔들이 트레일러다)

아 근데 이 교관, 갑자기 급경사로 기체를 치솟는다. 깜짝 놀랐다. 게다가 중간에 한번 급하게 턴도 한번 한다. ‘아 이 인간이 나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그러는구나..’ 직감했다. ‘오늘은 한 오백미터쯤만 올라갑시다’ 

올라갈수록 부딪히는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외투를 입었음에도 찬기운이 등까지 스며들어오고 눈에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른다. 교관은 앞이 보일까? 그제서야 보니 교관은 저혼자 고글을 쓰고 있다. 이런 띠바가.. 썬글래스만 낀 나는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그때였다. 카메라를 빨리 주머니 안에 넣으라고 고함을 지른다. 기체가 많이 흔들리려나보다..생각하고 그렇게 했다.

'이거 잡아요’ 고함을 지르며 느닷없이 조종간(Base Bar)을 내게 넘겨준다. 십오년전 홍모교관도 그랬었다. 갑자기 넘겨주고 깜짝 놀라게 한 다음 기체가 기울면 바로 자기가 다시 잡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잡았다. 그러나 손에 느껴지는 조종간의 저항감이 상상 이상으로 거세다. 15년전 제주도의 잔잔하던 바람에서의 그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다. 잡고 있기조차 어렵다. 억지로 겨우 붙들고 있었다. 내가 바를 잡자마자 갑자기 교관이 한쪽을 잡아당기더니 턴을 시도한다. 당연히 난 손을 떼었다. 근데 이 교관.. 자기도 손을 떼는 것 아닌가? ‘계속 잡아’ 황급히 다시 잡았다.

턴을 하면서 바를 나보고 잡으라고? 이넘이 지금 진심일까? 사전교육 단 한마디도 없이, 올라가면 잠깐 바를 잡아보게 해준다는 말 한마디 없다가 갑자기 나보고 이걸 잡으라고?


→ 하늘지기의 꿈 1 – 다시 꾸다
→ 하늘지기의 꿈 2 – 악전고투
→ 하늘지기의 꿈 3 – 일단 접다
→ 하늘지기의 꿈 4 – 하늘이 좋아 하늘에 지다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지기의 꿈 3 - 일단 접다  (0) 2007.04.08
하늘지기의 꿈 2 - 악전고투  (0) 2007.04.07
자식교육때문에 이민을?  (0) 2006.11.02
The Last Farewell to Mr. Burns  (0) 2006.10.19
번즈 아저씨  (0) 200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