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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파라 포셋 스토리

지금 사오십대 남자들이 여드름청춘이었던 70년대 중후반 무렵, 아직은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가 나타나기 전, 까까머리들의 가슴을 달뜨게 하고 때론 정신까지 몽롱하게 했었던 미국 여자 셋이 있었으니.. 소머즈의 린제이 와그너, 원더우먼의 린다 카터 그리고 미녀삼총사의 파라 포셋이 바로 그들이었다. 당시 까까머리들은 비슷한 비율로 삼등분되어 있었는데 난 소머즈였다.

원더우먼 (The New Adventures of Wonder Woman)의 린다 카터 (Lynda Carter)가 51년생


특수공작원 소머즈(The Bionic Woman)의 린제이 와그너 (Lindsay Wagner)가 49년생


그리고 미녀삼총사 (Charlie's Angels) 의 파라 포셋 (Farrah Fawcett)이 47년생


원더우먼이 쉰여덟, 소머즈가 환갑, 파라포셋이 예순둘이다. 이들의 현재 모습이 어떨까 늘 궁금했었는데, 다행히 TV에서 이들의 요즘 모습을 볼 기회가 몇번 있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는데 특히 소머즈와 원더우먼.. 이 둘은 정말 대단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만큼 '분위기 있게' 예쁘게 늙어 있었다. 소머즈야 젊었을 때도 분위기가 있었지만 인형같았던 원더우먼도 그랬다. 둘 다 오드리 헵번의 노년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자태. 하지만 파라포셋은 약간 좀 그랬다. 젊었을때도 치렁치렁한 머리결과 천박한 표정이 좀 퇴폐적이라고 느껴졌었는데, 늙어서도 약간 그런 느낌이 남아있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그 느낌이 많이 중화되어 있긴 했다. 

이 파라포셋.. 칠십년대 미국 청소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육백만불의 사나이' 리 메이저스가 꼽힌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었다. ‘파라 포셋을 매일 볼 수 있기 때문’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즉 리 메이저스가 본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의 부인 파라 포셋 때문이었던 거다. 한때 이렇게 잘 나가던 Farrah Fawcett 이 엊그제 죽었다. 하필이면 마이클잭슨과 같은 날 죽는 바람에 많이 묻혀버리긴 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많은 미국인들이 슬퍼하는 것 같다.


이런 그녀의 죽음으로 느닷없이 다시 세상에 나온 이름이 있다. 라이언 오닐(Ryan O'neil).

영화 ‘러브 스토리’의 남자주인공이었던 그 남자다. 영화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백혈병으로 떠나보내는 청년역을 맡았었던 라이언 오닐, 우수에 찬 눈빛이 일품이었던 그 남자다. 영화 러브스토리 이후 살았는지 죽었는지 존재감이 없던 그가 파라 포셋의 죽음으로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영화 러브스토리처럼 현실에서도 연인을 암으로 떠나보내는 비슷한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실제 이야기이다.


파라 포셋과 라이언 오닐이 처음 만난 것은 파라 포셋이 리 메이저스와 이혼한 후 그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후 서로 사랑하며 같이 살았지만 파라 포셋이 끝내 결혼은 거절했었고 1990년대 후반에 이 둘이 잠시 결별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1년 라이언 오닐이 백혈병에 걸리면서 재결합했는데 포셋의 극진한 간호로 오닐이 백혈병을 이겨냈다나. 날탱이로만 보였던 파라포셋의 순애보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 둘은 여전히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였었는데, 아마 포셋이 결혼 자체에 대해 심각한 염증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결혼으로 잃어버릴 연애감정을 지키기 위해서였겠다.

아무튼 이후 둘이서 알콩달콩 잘 사는가 했는데 포셋이 2006년에 덜컹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된다. 3년 동안 미국과 독일의 병원을 돌아다니며 투병을 계속해왔다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포셋은 2년 전부터 자신의 투병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 영상물이 'Farrah's Story'라는 이름으로 얼마전 NBC를 통해 방송되었다. 온 방송이 마이클잭슨의 이야기로 뒤덮히던 때에 이 다큐멘터리는 아주 조용히 전파를 탔다. 그날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이걸 봤다.

그 다큐멘터리엔 라이언 오닐의 모습이 꽤 많이 나온다. 그 옛날 영화 러브스토리의 장면은 생각나지 않지만(사실 난 이 영화를 내가 봤었는지 안 봤었는지를 잘 모르겠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오닐의 모습은 꽤 감동적이었다. 포셋의 평생 연인 오닐.. 영상속의 오닐과 포셋은 눈부셨다. 예순 여덟의 남자와 예순 둘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들의 모습, 흔히 보는 냄새 나는 노인네가 아닌, 이삼십대 젊은이들과 같이 사랑하던 그들.. 어찌 저 나이에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순 여덟 오닐이 예순 둘 포셋에게 청혼을 했고 포셋이 드디어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다.

그러나 포셋은 결국 결혼식을 앞두고 눈을 감았다. 보도에 의하면 마지막 눈을 감기 직전까지 포셋은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오닐이 그녀의 옆을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도 한편의 영화다. 죽기 직전까지 의식이 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댄다. 참 행복한 죽음이다. 그녀가 죽은 후 오닐이 독백하듯 말했다. 앞으로는 그 누구와도 포셋을 사랑한 만큼 그렇게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고. 이렇게 영화 러브스토리의 남자 오닐은 실제 러브스토리의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따뜻한 모습과는 달리 그동안 오닐에겐 어두운 모습이 더 많았다. 마약, 폭행, 성추행 사건과 같은 시끄러운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딸보다도 어린 스무살짜리 여자에게 집적대질 않나, 아들과 함께 마약을 하다 붙잡히질 않나.. 딸네미인 테이텀 오닐이 뉴욕에서 마약떄문에 체포되질 않나..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이 오닐이라는 남자, 나잇값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남자이며, 애들 교육 잘못 시킨 나쁜 아빠이며, 그로 인해 집안 전체를 콩가루 집안으로 만든 한심한 남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철 없는 날나리 오닐이 포셋의 죽음으로 다시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삼십년간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켜준 따뜻한 로맨티스트로, 영화 속 러브스토리를 현실로 산 순애보의 대명사로 말이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마약쟁이 오입쟁이가 졸지에 감동의 로맨티스트가 된건 다 포셋의 덕이다. 포셋은 마지막 순간 철없던 연인에게 정말 좋은 선물을 주고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시선과 제약에 묶여 ‘연애감정’이란 걸 아예 잊고 지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철없는 오닐의 로맨스가 신선한 충격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닐과 포셋의 모습을 보며, 많이 부러워하고 많이 시샘하며 많이 감동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