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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심형래 까기 - 영화평론가님네들

충무로
프랑스 영화 ‘여왕 마고’.. 빠리에서 이 영화를 봤다. 죽는 줄 알았다. 지루해서.. 근데 얼마 후 공교롭게도 우리회사에서 이 영화를 수입하게 되었다. 개봉도 하기 전에 신문에 난 영화평론가들의 평론은 칭찬 일색, 우리회사 담당자에게 어찌된거냐고 묻자 그가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 사람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예요’ 근데 이 영화.. 쪽박났다.

직접 영화를 제작하자는데, 로맨틱 코메디라고 한다. 슬슬 한물가기 시작하는 장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획자는 흐름을 타야 되는거라며 밀어 붙인다. 호스테스 영화가 판칠땐 그런 영화 만들어야 하고, 로맨틱 코메디 판칠땐 무조건 그런 영화 만들어야 안전하단다. 그래서 로맨틱 코메디물을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도 개봉도 되기 전, 평론가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기획자가 사람들을 잘 아는 덕이었다. 역시 이 영화도 ‘초대형’ 쪽박찼다.

연이은 실패에 열 받으신 높은 분의 지시로 영화파트의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충무로’를 약간 봤다. '영화인들의 메카'라는 충무로의 실제 모습은 참으로 역겹고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지적 수준 떨어지는 양아치들이 ‘영화인입네’ 하고 모여 있는 곳, 돈놓고 돈먹기, 파벌싸움, 극장주들의 횡포, 골빈 영화꾼들의 사기협잡, 영화꾼들에 붙어 기생하는 평론가와 기자들.. 이런 거대한 쓰레기더미들이 모여 코딱지 만한 영화사 간판걸고 영화인입네 하며 들끓는 곳이 충무로였던 것이다.

당시 사용처가 불분명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접대비 괄호열고 광고선전비 괄호닫고’.. 말도 안되는 이런 계정과목의 지출이 꽤 있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영화평론가들과 기자들에게 쳐멕인 돈이란다. 돈 먹지 않으면 좋은 기사 평론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써야 되는 돈, ‘돈의 액수’와 ‘평론의 호감도’가 정확히 비례 한다고. 궁금해서 물어봤다. ‘얘네들 영화는 제대로 보고 씁니까?’ ‘아뇨. 그냥 내 설명듣고 쓰는거예요’ 90년대 초반, 내가 본 ‘충무로’와 ‘영화평론가’들에 대한 기억이다. 물론 요즈음은 아닐거다.


평론가

다른 분야에선 '평론가'라는 걸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문화분야를 제외하곤 기껏해야 정치분야 정도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유독 문화부문에만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문화라는 것이 ‘각자 조꼴리는대로 느끼는’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놓고 사람마다 반응하는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좋아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 이것이 문화라는 것의 특징이겠다. 그래서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는 문화의 감상후기에 대해 먹물좀 뒤집어 쓴 놈이 잘난체 하며 방귀쫌 끼는 게 평론인 것이다. 상이한 시각과 입장을 가진 각 계층을 대변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을 터, 이게 문화평론가라는 직업이다.

(사실 ‘평론가’는 영어로 Critic, reviewer, essayist 정도이다. 어떤 대상을 비판하거나, 감상후기를 말하거나,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본다면 모든 분야에 평론가는 존재한다. 실제로 외국에선 ‘칼럼니스트’ ‘스페셜리스트’라는 일반직함으로 사람들이 각 분야에 대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비평을 가하는 것을 많이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유독 ‘문화평론가’라는 직업이 요란스레 따로 있다. reviewer 일 뿐인데 평론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러 준다. 먼저 보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감상문 작성자’가 ‘평론가’라는 이름표를 붙이니 갑자기 상당히 고차원의 전문직업인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다. 해박한 백그라운드, 냉철한 분석력과 객관성을 가진 엘리트집단인 듯 착각이 든다.)

평론가들은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천차만별의 주장이 있게 마련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들의 신뢰는 잣대의 절대성이 좌우한다. 즉 어떤 경우에서나 흔들림 없는 나름대로의 주관과 논리의 객관성이 평론의 시작이며 끝이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관객들과는 달리 항상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관객의 작품선택에 바른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 평론가의 임무이다. 때론 가혹한 비판을 가할지라도 그건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충고이다. 그래서 평론에는 쓴 비판과 함께 애정이라는 것이 늘 곁들여져 있어야 한다. 비판과 애정..


심형래
심형래를 편들자는 게 아니다. 난 심형래의 바보연기를 경멸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떨어져도 안참 뒤떨어진 그의 '감'을 여전히 경멸하는 중이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역시 저질이었다. 그러던 그가 영화를 직접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첫 영화에서 참패했다. 바보영구가 하는 짓이 그렇지.. 라는 멸시에 그만 포기할 줄 았았는데 웬걸 그는 또다시 달려 들어 더 큰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일단' 대박을 터뜨렸다. 근데 같이 기뻐해줄줄 알았던 ‘충무로 영화인’ 들과 ‘영화평론가’들이 심형래와 그 영화에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무자비한 비평 비난만 있다. 애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왜 그럴까?

‘충무로’ vs ‘비충무로 심형래’간의 전쟁이다. 
‘문화 권력, 평론가’ vs ‘그걸 무시한 심형래’간의 전쟁이다.

조폭코메디 하나 뜨면 너나 없이 조폭코메디 만들던 한심한 충무로 영화인들이, 코메디언 심형래가 느닷없이 돈을 끌어모아 컴퓨터그래픽으로 대형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영화의 수준은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 국민들이 열광한다. 충무로의 정통 영화인들이 자존심에 크게 손상을 입은 거다. 저질 코메디언이 만든 수준미달의 저질영화에 사람들이 몰리다니. 심형래가 봉투들고 찾아 올줄 알았던 평론가님네들, 봉투 하나 건네지 않는 심형래가 이쁘게 보일 턱이 없다. 평론가를 제치고 국민들의 애국심에 직접 광고하는 심형래가 심히 고까우신거다.


디워는 참 좆같은 영화
‘부모성 같이쓰기(이거 정말 경멸한다)’를 하는 두 영화인이 한마디씩 했다.

(얼핏 보면 노홍철같은 이 놈이 영화감독이다)

'디워는 참 좆 같은 영화'라고.. 그래서 도대체 그들은 얼마나 수준 있는 영화를 만들길래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한 놈의 이름을 추적해서 그가 만들었다는 영화를 드디어 일요일날 봤다. ‘올드미스 다이어리’. 디워에 그렇게 일침을 가하는 젊은 영화인의 패기와 자신감이 도대체 어떤 근거로부터 나오는지 궁금했다. 몹시 기대가 되었다. 영화가 괜찮다면 열악한 제작환경아래서 노력하는 이름없는 충무로 영화인들의 비평을 수긍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이었다. 시종일관 난삽하기 그지없는 삼류영화. 순간순간 무의미한 웃음을 유발하는 설정외엔 모든 것이 실망이었다. 이런 띠바셰이.. 이런 걸 영화라고 만드는 놈이 남의 영화를 욕 해? 심형래의 영화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정도면 최소한 기본적인 자질은 넘칠거라고 생각했던 건 완전히 착각이었다.


난 디워를 보지 못해서 이 영화에 대해선 할말이 없다. 영화인들이 원색적으로 비난을 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수준 이하의 영화임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디워를 나쁘게 비평한 영화인들과 평론가가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거 이상하다. 나쁜영화를 나쁜영화라고 하는데 국민들이 왜 이러는 걸까?


자업자득
한동안 국민들이 전폭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인들은 이를 배신했었다. 근본이 저질인 충무로 영화인들이 국민들의 성원에 초심을 잃고 돈벌이 목적으로 아류작들만 양산해내다가 한국영화의 위기를 자초했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싸늘한 반응은 이에 대한 죄값이다.

그동안 수도없이 흥행과 무관하게 극찬 평론을 쏟아낸 저질 평론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단죄이다. 이해하기 힘든 말을 쓰면 독자들이 기죽을 것으로 알고, 앞뒤 전혀 없는 쓰레기같은 글을 쓰고 있는 평론가들에 대한 역겨움의 표현이다. 받은 돈 값은 해야겠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니 용돈구멍이 막힐 것 같고, 좋은 말을 쓰자니 뒤가 구려서.. 그래서 이런 현학적인 표현들을 쏟아내는 불쌍한 평론가들에 대한 비난이다. 그래서 평론가들을 ‘똥구멍에 기생해서 똥물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라고 매도를 하는 것이다. 정작 자기는 할 줄도 모르고, 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힘들게 해 놓은 결과물에 이러쿵 저러쿵 똥물을 튀기는 대한민국의 평론가들.


평론
영화감독과 제작자는 영화를 만들고 난 후에도 바쁘다. 부지런히 영화평론가들을 찾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촌지를 얻어 먹으면 평론가는 입장이 난처해 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의미인지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영화평론을 자주 본다.

‘즐거운 변주에 성공했다.’
‘현재 진행형의 영화적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다소 안타깝다’

당신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가? 앞뒤없는 쓰레기 같은 말에 현학적 표현만 덧 씌워 거창하게 평론이라고 낸다. 이게 우리나라 영화 평론가들의 현주소다.  우리나라의 영화평론은 딱 두가지다. 촌지가 없었으면 피 튀기는 비평, 촌지가 있었으면 이런 애매모호한 평론, 이렇게 딱 두가지다. 

평론가를 비판하자 평론가들이 발끈한다. 하지만 자기들의 비평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남이 자신들에게 하는 비평은 철없는 국민들의 무의미한 비난으로 폄하하는 것은 평론가의 자세가 아니다. 비평이 직업인 자들이 어찌 자신들에 대한 비평에는 그리 격분하는가? 자신들부터 냉철히 돌아보고 스스로가 평론가로서 자질이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내용이 뭔지 이해되지도 않는 현학적인 말장난으로 관객들을 현혹시키고, 자기 개인의 문화취향을 억지로 강요하고, 약한자에게는 문화권력으로 군림하고, 강한자에겐 기생하며 똥물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