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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나운서따위가 왜 그리 화제가 되나?

‘특정 아나운서 때문에 모든 아나운서의 이미지가 도매급으로 하락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미인대회에 출전한 아나운서를 두고 경쟁방송사의 아나운서실장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다.


귀에 하도 익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는 호칭, 'ooo 아나운서'... 아무리 새파란 젊은 애라도 그가 아나운서이면 꼭 뒤에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붙여줘야 하는 것이 방송가의 불문율이다. 아니 불문율이 아니라 아나운서실의 강력한 요구다. 오락방송에서 아나운서를 편하게 'ooo 씨'라고 불렀다간 아나운서실에서 곧바로 항의가 들어간다. '계속 그러면 우리 애들 안보낸다. 우리애 이름 뒤에 ‘아나운서’라고 꼭 호칭 붙여.'

얘네들 아나운서라는 애들, 왜 이럴까? 뭔가 심각한 자격지심이라는 냄새가 난다.
이 아나운서라는 애들, 왜 이렇게 아나운서라는 호칭에 이리 목숨을 걸까? 도대체 이 사람들.. 아나운서라는 직업인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고고한 것으로 알고있길래 이리 부글대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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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는 원래 ‘음성전달자’
아나운서는 원래 ‘음성전달자’를 말한다. 즉 방송의 여러 작업가운데 [음성표현]을 업무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방송에서 아나운서란 특정한 직업군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라 목소리로 뜻을 전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포츠 캐스터도 아나운서이고, 방송광고카피를 읽는 사람도 아나운서이고, 라디오에서 활약하는 성우들도 아나운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일본에서 베낀것이라고 알고있다) 희한하게 이 아나운서라는 것이 특정한 직업군으로 따로 독립되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국적없는 직종이며 부모가 불확실한 사생아이다. 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원류는 라디오 시절 뉴스를 써준 원고대로 또박또박 읽어주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읽기'를 아주 잘하는 '목소리 좋은 애들'이 바로 우리나라 방송국에서의 아나운서다.


아나운서들의 자격지심
라디오 시대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티비시대, 바야흐로 영상매체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기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자기 직업에 대한 ‘자격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이 써준 걸 읽기만 하던 앵무새’라는 ‘단순한 업무’에 바아햐로 부끄러움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를 써 주는 기자들로부터의 모멸감은 이들로서는 참기힘든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방송국내에서 드디어 패거리를 형성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 패거리의 형성과정은 여느 패거리들과 다르지 않다.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진 사람들이 생존을 위하여 모이는 그것이다. 드디어 방송국내 다른 업무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는 누가 써준대로 읽기만 하는 앵무새가 더 이상 아니다’ 라는 공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나운서의 원래 영역인 ‘음성표현’외에 ‘얼굴표정표현’과 ‘신체행동표현’을 추가하고 자신들의 이름뒤에 아나운서라는 직함을 반드시 불러주기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정동영을 모 국회의원이 ‘아나운서출신’이라고 비아냥댔더니, 정동영이 이것을 정정했었다. [나는 ‘아나운서출신’이 아니라 ‘기자출신’입니다.]

아나운서들이 듣고서는 상당히 기분나빴을테지만 이 말은.. 난 얼굴 반반하고 방송국 빽줄만 있으면 채용되는 ‘골빈 아나운서’가 아니라 치열한 시험과 경쟁을 뚫고 떳떳하게 입사한 ‘똑똑한 기자’라는 항변이다.

이것이 방송국 아나운서들의 실제 위상이고 냉엄한 현실이다. 태생적으로 방송국내에서 무시받을 수밖에 없는 직종. 그래서 스타급 아나운서중엔 그런 아나운서라는 직종의 허접한 위상에 염증을 느껴 중간에 기자로 전직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손석희와 김주하이다. 이 손석희와 김주하의 변신이 우리나라 방송국내에서 아나운서라는 직종의 위상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아나운서 이미지 조작
아무튼 이렇게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아나운서들은 기를 쓰고 자신들의 위상과 이미지를 높이려 안간힘을 쓴다. 바로 '아나운서의 이미지 조작'이다. 방송국내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끝내 그런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결국 아나운서의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단정한 옷매무새에 기품있는 몸짓, 지적인 말투와 표정.. 아나운서들은 전 국민들을 상대로 '신뢰'의 이미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나운서'하면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예쁘고 말 잘하는 신뢰감 있는 방송진행자로 여긴다. 다 선배 아나운서들이 피땀어린 노고의 결과다.

그러나 요즈음 신세대 아나운서들은 다르다. 그들은 딱딱한 이미지의 보도국 이미지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얼핏 그들의 외모나 행동거지로만 봐서는 그들이 딴따라 연예인인지 엄숙한 보도국 직원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이다. 선배들은 이런 신세대들이 마음에 들 턱이 없다. 그들이 어렵게 이룩해 놓은 조작된 도도한 이미지가 훼손될까 걱정이 된다.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모든 것이 환상
그러나 방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환상이다. 선배 아나운서들이 필사적으로 이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던 것도 환상이고, 젊은 신세대 아나운서들이 감성과 이성을 결합시킨 엔터테이너 이미지도 환상이다. 환상이라는 뜻은 모든 것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모습이라는 뜻이지만, 늘 그렇듯이 우리들은 방송에서의 이미지를 실제상황이라고 착각한다.


방송의 꽃 여자 아나운서
요즈음 여성 아나운서들은 아나운서의 엄숙한 이미지에 연예인의 발랄한 이미지를 덧씌워 국민들로 하여금 색다른 상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상품이다. 바야흐로 그들을 방송의 꽃이라고 부른다. 여성의 상품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들을 지나친 상품화를 어떻게 바꿔보려고 해도 그것을 부추기는 것 역시 여성들 자신이다. 여성들은 그 상품화 구조에서 스스로 자신을 상품화시키면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간다. 

노현정은 자신을 상품화시켜 남성들의 눈길을 잡은 대표적인 아이다. 행동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낸 아이다. 노현정의 이미지 전략은 아주 간단하다. 고고하고 지적인 아나운서 이미지에 얼음공주라는 연예인 캐릭터를 결합시켜 남성들로 하여금 정복하고 싶은 욕망과 환상을 갖게 부추긴 것이다. 즉 선배들이 피땀흘리며 이루어 놓은 지적인 이미지를 공짜로 거저 먹고, 그곳에 엔터테이너로서의 캐릭터을 얹은 퓨전 이미지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신분상승을 꿈꾸는 발칙한 것들
요즈음 방송국의 여자 아나운서실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얼굴 예쁜 무서운 계집애들이 집단적으로 몰려있는 곳으로 보인다. 그곳의 영악한 아이들은 상류층의 속성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상류층 남성들이 ‘대중들이 선망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소위 딴따라 연예인은 외부의 부정적 시선과 집안어른의 반대로 성공률이 낮다는 것도 안다. 따라서 영악한 그 아이들이 택한 것이 바로 아나운서의 길이었다. 조작된 아나운서의 그 복합적 이미지는 상류층의 욕구를 골고루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선망의 대상이니 젊은 아들의 욕구도 충족되고, 아나운서라면 품위있을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부모들의 눈높이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노현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뭘까? 속내는 노현정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지배.. 드뎌 성공했구나. 깜찍한 것’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신분 상승 욕구가 있고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그것을 쉽게 이루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내가 못한 걸 해낸 저 아이가 미치도록 부럽다. 여건이 되지 못한 내 처지가 속상하기도 하고, 부모 잘 만난 그 아이가 얄밉기도 하다.

하지만 방송 내부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서 환상의 추잡한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노현정의 거짓환상에 일희일비하던 남자들, 혹은 과거 노현정보다 훨씬 예쁘고 날렸던 친구들은 이런 노현정에게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겠다. 게다가 엊그제까지도 깊게 사귀고 있던 남자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런 분노는 더 극을 치닫겠다. ‘더러운 년.. 교활한 년, 무서운 년.’

여성 아나운서의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상류층에게 당연히 어필하여 신분상승의 일차관문에는 성공 한다. 그래서 일단 상류사회로의 진입은 이루어 내지만 그런 결혼은 대부분 불행해진다. 그 이유는 바로 억지로 조작된 이미지 환상과 실제의 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심각한 불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년 이거 알고 봤더니 순 걸레일세..’ 뻔하다.


남자들은 왜 여자 아나운서에게 관심을 가질까
남자들이 가진 여자 아나운서에 대한 환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말했듯이 여자 아나운서들은 두가지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아나운서의 도도하고 지적인 매력에 더하여 신세대 연예인으로서의 발랄한 끼도 가지고 있다. 그 두가지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낸다.

도도하고 지적인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중압감을 심어준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것 같은 그런 부담감의 일종이다. 그래서 더욱 그것을 깨어버리고 싶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제복이나 정장을 말끔하게 입고 사무적인 표정의 여성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귀부인들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 같은 것일 게다. 남자들은 이상한 상상을 한다. 그 위치까지 가기 위해 바친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 전혀 빈틈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이다.

요즈음의 여성 아나운서들은 두가지 이미지가 섞인 여자들이기 때문에 환상이 쉽게 얹혀진다. 즉, 달려들어 정장을 찢어버리고 아래에 눕히면 갑자기 분홍색 끈 속옷이 드러나면서 퇴폐적이고 도발적인 여자로 돌변할 것 같은 그런 환상이다. 당연히 남자들의 관심은 더 높아지게 마련이다.


아나운서는 그저 우리나라 방송의 꽃일 뿐
‘비키니 여자 아나운서’와 ‘재벌꼬시기에 성공한 아나운서’가 화제가 되는 배경은 서로 같다.
아나운서에 대한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서로 대결하고 있는 국면이다.

아나운서들은 그리 지적이지 않으며, 그리 정숙하지도 않으며, 그리 착실하지도 않다. 아나운서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으며, 그리 발랄하지도 않으며, 그리 퇴폐적이지도 않다. 아나운서들의 이런 이미지는 억지로 만들어진 인위적 이미지이다.

‘아나운서는 늘 정장차림이어야 한다’ vs ‘냅둬.. 벗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
‘아나운서는 지적인 공인으로서 국민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 vs
‘아나운서는 그저 연예인일 뿐이므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진 말아야 한다’

이런 논란자체가 우습다. 여성 아나운서라는 애들중에 이런 논란이 합당할,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애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과분한 칭찬이 되고 과분한 관심이 된다. 따라서 그 아이들은 이런 논란을 더더욱 즐기고 있다. 몸값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는 단순히 그냥 방송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연예인일 뿐이다. ‘비키니 아나운서’와 ‘재벌꼬시기에 성공한 아나운서’가 화제가 되는 이상한 현실. 노현정이 현대그룹의 정대선과 결혼을 하든 말든, 김주희가 미인대회에 나가서 비키니를 입든 말든.. 그게 왜 소모적 논란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아나운서라는 단순한 연예인이 비상식적으로 과대포장 되고, 비상식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뒤틀린 세태가 빚어낸 슬픈 코메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