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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번즈 아저씨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 고향이야기와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었었다. 아일랜드 자그마한 시골마을. (그가 늘 이야기 했었는데 마을이름을 잊어 먹었다.) 작년 여름 그가 아주 오랜만에 그 고향마을에 다녀온 이후 그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고향을 그리워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자기의 고향은 옛날 그대로라고 했었다. 아직도 자동차가 별로 많지 않아 공기는 맑고, 숲은 아직도 깊으며 하늘도 푸르다고 했었다.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한동안 그 고향을 그리다 아일랜드로의 영구귀국을 고민하는 듯 하더니 역시 현실 때문에 그 꿈을 아쉽게 접었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기 부모님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투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가진 존경과 사랑은 거의 신앙처럼 절대적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가치관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자기의 웃는 모습이며 말하는 태도며 생각하는 가치관과 인생관이며 모두 부모님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하늘에서 자기를 지켜 봐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늘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아주 가끔은 곧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날이 멀지 않아서 설레인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웃음만 짓곤 했었다.


나는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내게 오는 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찾아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먼저 가신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면서 가슴을 저리는 다른 아들들처럼 나도 아버지가 지금 안계심에 가슴 아파하면서, 그를 보며 아버지에 대한 못다한 아쉬움을 곰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 절대적이었던 아버지를 대하듯 그에게 괜히 시시콜콜한 것도 묻기도 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었다. 무엇을 부탁해도 그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었었다. 5분이면 해결될 일도 그는 정성을 다하느라 삼십분을 넘기곤 했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 듯이 그는 그렇게 내게 항상 정성스럽고 따뜻했다.

그는 참 생각이 바르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그의 대답은 늘 나를 놀래켰었다. 이렇게 바르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렇게 인생을 관조하면서 살고 있구나.. 내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차근차근 천천히 쉽게 다시 설명해 주곤 했었다.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던 그는 모든 것을 역사와 견주어 이야기 해주곤 했었다.

젊은 시절 뮤지컬 가수, 연극배우였던 그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노래를 즐겨 부른다. 몇 달전에도 새로 취입한 곡이라며 씨디를 구워가지고 왔다. 물론 친구들끼리 재미로 하는 작업이고, 이제는 노인들의 쉰 목소리이긴 하지만 씨디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아직 열정이 있고 힘이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 듣기를 참 좋아했다. 어버어버 짧은 영어로 서투르게 이야기해도 그는 귀신같이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챘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때때로 정치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 그는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기분좋게 동의해 주었다. 거의 40여년의 나이차였지만 그와 나는 생각하는 면이 굉장히 비슷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똑 같고,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똑 같고, 종교에 비판적인 것도 똑 같고, 정치인을 혐오하는 것도 똑 같았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는 한국의 음악과 문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을 참 좋아했다. 한국이 ‘동양의 아일랜드’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여러가지로 한국과 아일랜드는 공통점이 많다고, 그래서 음악의 느낌이 서로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그로 통해 아일랜드의 음악이야기와 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서 들었다. 대니보이의 슬픈 배경도 그에게 들었다. 나는 자연히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고 언젠가 그와 함께 아일랜드 그의 고향에 가기로 약속도 해두었었다.

그런 그가 벌써 한달째 오고 있지 않다.

일주일에 한번 내게 오는 게 큰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했었다. 아일랜드 여행 때와 무릎수술을 받던 때를 제외하면 단 한주도 빠진 적이 없던 그가, 혹시라도 일이 있어서 약속된 날에 못 오면 꼭 미리 전화를 해서 다른 날로 약속을 변경하던 그가 벌써 한달째 오고 있지 않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면 되지만 전화를 걸 엄두가 도저히 나질 않는다. 겁이 난다. 그가 오지 않은 첫주때부터 시작해서 ‘다음주에도 안 오시면 전화해 봐야지..’ 이러길 벌써 한달째. 이번주도 그의 전화번호를 들고 몇번을 망설였다. 그러나 역시 이번주에도 전화를 못했다.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의 연세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마지막 오셨을 때에 요즈음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고 걱정하시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그가 어디 좋은 곳에 여행을 가셨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정이 바빠서 내게 전화를 못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여행에서 돌아 오시면 밝은 목소리와 얼굴로 내게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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