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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한의학에서의 숭배.. 한의불오를 접는다

가까이 했을 때 가장 불편한 사람들은 '뭔가를 崇拜하는 사람들'이다. 이 '숭배'라는 말에는 ‘무지몽매하다’는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영리한 사람들은 쉽사리 뭔가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그런 모습을 '신념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한다. 신념이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우린 누구나 이 신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어떤 사람은 종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종교에 귀의한다. 명랑생활이 사회를 명랑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런 무분별한 명랑생활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멀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신념이란 때로는 서로 상충되고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심하지만 않다면 신념이란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의 신념과 다른 모든 신념들을 무조건 죄악시하게 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한다. 나와 다름은 무조건 ‘틀림’이 되어 버린다. 이 순간 그들에게 ‘신념’이라는 희망적인 단어는 ‘숭배’라는 절망적이고 가슴 답답한 단어로 바뀐다.

'신념'과 '숭배'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판단력’과 ‘중독성’ 그리고 ‘배타성’의 여부이다.

내 가치체계에 상식의 판단력이 행사되지 못할 때 그건 숭배다.
내 가치체계를 고민하지 않고 끝없이 되뇌이면 그건 숭배다.
내 가치체계에 대한 충고에 이성을 잃고 대응을 하면 그건 숭배다.

숭배의 문제는 곧 우리사회에서 ‘판단력 상실’의 문제 ‘중독’의 문제이며 ‘배타적 고립’의 문제이다. 고민하고 궁리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없어짐으로써 그 자리를 대치하는 것이 바로 이런 맹목적 믿음, 숭배다. 인간들이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 지고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한의학에서의 숭배
숭배란 욕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얻으려고, 정복하려고 욕심부리던 것들에게 도리어 속하게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가 있다. 거기에 경제논리까지 덧씌워지면 숭배는 '살아가는 방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 숭배가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전염되면 될수록 내 자신이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대표적인 직업이 목사와 한의사다. 그들의 숭배를 더더욱 굳건하게 신봉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숭배의 정도가 심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개신교'와 '한의학'이다. 이런 말을 하다가 또 무슨 공격을 받을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이다. 그 두 분야는 숭배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분야이다. 그래서 New Age라는 종교이야기 폴더와 한의불오라는 한의학이야기 폴더를 두고 이 두 분야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었다. 

한의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심각한 혼란과 갈등에 빠지는 때가 틀림없이 온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끝없이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방향상실에 고생하는 때가 온다. 이 무렵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무조건 믿을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따져 볼 것이냐. 일부는 궁리하길 포기하고 무조건 믿기 시작한다. 아니 그렇게 하라고 꼬드기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속칭 ‘도사’들이다. 그들을 따라 믿기 시작하니 진짜로 모든 것들이 그렇게 변하기 시작한다. 나도 도사가 되어간다.

한의학은 철학이다. 끊임없이 궁리하고 고민해야 한다. 대부분의 학도들은 그렇게 궁리하고 고민한다. 그렇게 정진하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한의학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을 우리가 그동안 헛되이 믿어온 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 허울을 벗어 던진다. 그러면 그제서야 눈앞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동안 괴롭히던 안개에서 벗어나게 된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를 ‘음양관이 생겼다’라고 표현한다.

같은 밥그릇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이때 밥그릇 충돌이 생긴다. 궁리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믿어버린 사람들과 치열하게 궁구한 후에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 간에 충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하는 수준과 구조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끼리이기 때문에 애당초 토론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주류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 ‘깨달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자기들이 깨달은 ‘신념’을 포기하고 믿는 사람들의 ‘숭배’에 묻히기로 결정한다. 이게 현실이다.


숭배는 이미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 이후라고 했다.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고 내 가치관에 배치되면 무조건 타도해야 할 사악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공격한다. 그들의 숭배를 지적하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 양 날뛴다. 그래서.. 더 이상 안 건드리기로 했다. 숭배는 집착이다. 집착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은 진리를 깨우치는 데 큰 장애가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