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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생각

한글에서 존댓말을 없앴으면 좋겠다

존댓말을 얼마나 적절하게 잘 구사하느냐가 말 잘하는 사람의 기준이 되어도 될만큼 우리말의 존댓말은 어렵다. 너무 심하면 눈꼴사나운 아부나 아첨이 되기 십상이고 조금이라도 덜하면 버릇없다 찍히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나고 교육받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이 존댓말의 적절한 구사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날 찾아준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때를 보자. 왔냐 - 어서와 – 어서와요 – 어서오세요 – 어서오십시오 – 오셨습니까 – 그냥 인사만.. 이렇게 일곱가지의 화법중에서 적절한 것을 찾아야 한다. 아주 친한 사이이면 왔냐.. 해도 되고, 존경의 강도에 따라 차례대로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또 너무 높은 사람이면 ‘어서오십시오’라는 것이 뭔가 결례가 되는 것 같아 그냥 ‘오셨습니까’ 하거나 그냥 꾸벅 인사만 해야 한다. 게다가 어서오슈 어서옵셔 머 이런 것들까지 고려하다보면 한국말에서 존댓말을 적절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고난도의 기술이다.

존댓말의 구사만 어려운 게 아니다. 반말에서 존댓말로, 존댓말에서 반말로 옮겨가는 시점의 포착도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엄마 아빠 이랬어 저랬어.. 반말을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엄마 아버지께 존댓말을 써야 하는데 그 시점을 잡기가 여간 어색하고 난감한 게 아니다.

반대로 존댓말을 하다가도 언젠가는 서로 말을 놓자는 선택의 시기가 도래하는데, 반말을 하고 서로 거리낌없이 욕하는 게 절친한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친구간 혹은 이성간 이렇게 서로 말을 트는 시점도 포착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또 서로 모르던 족보가 캐어져서 졸지에 위아래가 바뀌는 바람에 그 동안 쓰던 어법을 바꾸어야 하는 곤란한 경우에 닥쳐 아예 관계자체가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존댓말이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긴 생략하겠다. 유구한 역사속에 내려온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란 얘기도 생략하겠다. 존댓말의 대척점에는 반말이라는 게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게 문제다.

제대로 할 줄 아는 말은 한국말밖엔 없지만 하루에 서너가지 나라말(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을 엉터리로 섞어 쓰며, 그 와중에 언어간의 객관적인 비교를 하게 되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 별로라고.. 하나로 통일된게 훨씬 낫다고.. 존댓말엔 오히려 역기능이 훨씬 많다고..

우리나라사람처럼 직급을 불러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 이름 그대로 그냥 ‘홍길동씨’라고 불리워 지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부르면 대부분 몹시 기분 나빠한다. 홍길동대리, 홍길동 아나운서, 홍길동 기자, 홍길동 선수, 홍길동 코치, 뭐라도 호칭을 뒤에 붙여줘야 하고, 구멍가게 주인도 사장님이고, 아줌마는 전부 사모님이라고 불러줘야 좋아한다.

오락프로그램에 나온 ‘홍길동 아나운서’를 그냥 편하게 ‘홍길동씨’ 했다간 나중에 항의가 들어간다. 써 준대로 읽기만 하는 그 아나운서가 뭐 그리 대단한 전문직인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뒤에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뺐다간 눈에 불을 켠다.

유서깊은 유교문화 군대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윗사람 아랫것이라는 계급의식이 너무나 투철하여 그것을 구분지어 주는 문화적 도구들을 굉장히 사랑한다. 허리굽혀 인사하기, 두손으로 술 따르기, 어른앞에서 담배 안피우기, 윗사람앞에서 다리 안꼬기.. 그리고 존댓말과 반말.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급의식을 갖게되고 그것을 전혀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싸움의 시작은 대부분 반말에서 비롯된다.
건전하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던 토론이나 논쟁이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하게 반전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경험한다. 이유야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십중 팔구는 바로 말투에서 비롯된다. 이웃간 혹은 조직내 불화나 사소한 싸움의 시작이 어이없게도 이 말투 때문에 비롯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며, 큰 싸움으로 번지는 바로 그때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서로 이성을 잃게 되는 첫번째 단계가 바로 이 말투에 관한 시비이다.

상황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나가는 상태에선 웬만해선 사람들이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논리를 듣고 그에 반박할 논리를 준비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이어간다. 적어도 이성이 지배하며 진행되는 토론이나 논쟁에선 ‘님께서는 그 정도의 사고능력밖에 갖추지 못하셨습니까? 참 한심하십니다’ 같은 극히 실례되는 말은 웬만해선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로 위와 같은 불경의 언사가 튀어나오고 그것을 들은 사람이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당신..’ 했다 하면 그때부터 상황은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한다.

‘어따대고 반말이야..’ ‘너 몇살이야’ 그러다가.. ‘이 새끼가 넌 에미애비도 없냐’

책에 나와있는 시리즈다. 이거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많이 듣는 말이다. 당연히 상대로부터 존댓말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느닷없이 반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순간 분노가 치밀고 그것이 악의적으로 계속되면 그 사람은 급기야 이성을 상실하게 된다. 논리로 승부를 걸어야 할 토론이나 논쟁이 졸지에 족보를 캐며 누가 낫살 더 쳐먹었나, 누가 더 싸가지 없나 하는 경연장으로 돌변한다.

애당초 존댓말이 없다면 반말이 그렇게 사람의 이성을 잃게 할만큼 기분나쁘게 들리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반말이 애당초 없다면 굳이 반말로 어투를 바꾸어 상대방의 이성을 잃게 할 일도 없을텐데.. 그 두 어투가 같이 존재하는거 그게 문제다.

모두가 해탈하여 아무리 상대가 불경해도 화내지 않는 세상이 올리는 만무하고.. 한민족이 갑자기 전멸해 이 존댓말과 반말이 사라지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므로 '대화할때 열받지 말자' ‘존댓말만 사용하자’ 혹은 ‘반말로 통일하자’ 라는 실현 불가능한 헛된 주장은 펴지 않는다.

오늘 신문을 보니 최민수에 대한 기사가 있다. 오락방송에 나와서 같이 출연한 친하던 후배들에게 반말을 했다가 네티즌들에게 치도곤을 맞았던 모양인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방송에서는 반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방송규정을 어겨서 그랬다고 한다. 방송에서 은어나 비속어를 쓰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 당연히 마땅하다. 그러나 방송에서 써서는 안되는 말의 반열에 ‘반말’을 같이 올려놓고 무조건 똑같이 취급하여 규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송에서 반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의 시청자들에게 반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린이 프로 좌담에 나온 사람이 듣는 사람이 설사 어린이들이라고 해서 시청자를 향해 반말을 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극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드라마엔 사투리와 반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방송에선 존댓말과 표준어만 쓰게 되어있다. 이거 문제가 될까? 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잘 아는 선후배들이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평소 자기네들이 하던대로 (그리고 우리국민들 100%가 사석에서 그렇게 하듯) 서로 반말을 주고받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해악을 끼치므로 규정에 어긋나고, 인위적이고 꾸밈이 있더라도 꼭 서로 존대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글쎄.

일단 사과를 해서 발을 뺐지만.. 최민수.. 어지간히 답답하겠다. 황우석때문에 가뜩이나 답답한 차에, 친구 아버님의 부고로 우울하던 차에, 비현실적 비상식적인 기준으로 사람하나를 또 때려잡고 있는 걸 보니 더 답답해 진다.

아주 예전에.. 제작비 때문에 어려워 하던 사람들을 위해 미리 받았던 출연료를 도로 토해내면서
‘잘되면 더 주시고, 안되면 같이 책임지지요 뭐, 하하하’ 하던 그 최민순데.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토크쇼 아닌가? 우리 토크쇼는 아직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아 아쉽지. 선진화된 토크쇼를 위해서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짊어졌다고나 할까] 최민수 曰..

최민수.. 힘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