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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도둑놈! 고맙습니다

책을 버리는 행위를 무도한 죄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지성의 말살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그동안 많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녔었습니다. 그러다 얼마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그 책들을 보기 위해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과시하기 위해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움직일때 그 책들을 모두 버리기로 했습니다.

 

지난번 갑자기 한국에 갔었던 참에 한국에 있던 오래된 책들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버리기'의 첫번째 실천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제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묻어있는 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가벼워지는 법..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실행하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각각의 책들이 모두 소중했습니다. 이건 이래서 못버리고 저건 저래서 못버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정말로 진하게 묻어있는 몇권의 책들만 남기고 모두 없앴건 그로부터 꽤 여러날 끙끙대고 난 이후였습니다. 텅 빈 책꽂이를 보며.. 괜한 죄책감만 잔뜩 들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을 정리하는 것이 버리기의 진짜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한달전 씨애틀로 올라갔었던 동생이 자동차를 가지러 LA에 내려왔습니다. 그에게 제 책들을 버리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왕이면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동생이 의탁하고 있는 씨애틀 정무문 대장님도 제 책을 준다니 아주 좋아하십니다. 쓸데없는 물건 잔뜩 쌓아두기 좋아하는 동생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버려라.. 다 버려라.. 그리고 책들 가지고 가라' 동생이 씨애틀로 돌아가는 어제, 사무실에 나와 버릴 책들을 꺼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차에 책 실을 공간이 하나도 없답니다. 내려가서 차를 확인해 보니 제가 버리라고 그렇게 당부했던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실어놨습니다. 동생을 심하게 나무랐지만 결국 제 책들은 하나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사무실로 올라와 꺼내놓았던 책들을 다시 책꽂이에 넣으려던 찰나.. 제 방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살펴보니 기타 두대와 밴조가 보이질 않습니다. 지난 밤 도둑이 들었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 겁니다.

 

가슴이 부글했습니다. 이런 @#$%&%&(*..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렸습니다물건 잃은 걸로 못 끝내고 마음까지 상하면 나만 손해..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정심을 금세 되찾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도둑놈이 악기만 들고 갔을까?’ 서랍속의 외장형 하드디스크가 떠올랐습니다. 제 모든 자료가 들어가 있는 500 GB짜리..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서랍을 열어보니.. 없어졌습니다.

 

아뿔싸.. 평정심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무소유정신이고 뭐고, 버려야 채워지고 뭐고.. 속이 너무 상해 숨까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수십년동안 어렵게 구해 온 온갖 자료들.. 프로그램들.. 200기가 음악파일, 한곡 한곡 tag 정리했었던 피같은 수만곡 음악파일들.. 속상함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습니다.

 

이성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삼십분쯤 지나서였습니다물건 버리지 못했다고 동생을 그렇게 나무라놓곤, 제 물건 없어졌다고 잠시 미쳤었던 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남에겐 그렇게 버리라고 강요해놓곤 정작 제 자신은 버릴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니.. 제가 책을 모두 버린다고 거창하게 굴었던 것은 새빨간 거짓이었습니다. 무겁고 귀찮은 책들은 폼나게버리고, 작은 외장하드 자료들은 몰래 끌고 다니려는 '사기'였습니다.


그런 제가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버려야 할 것을 조금 일찍 버렸음을 인정하자, 신경쓸 것도 그만큼 줄어 맘이 편해졌습니다. 파일 날아갈까봐 그동안 어지간히 신경을 썼었거든요. 지금은 파일들이 아주 없어진 것이 고맙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소중해하던 것이 없어졌는데도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값진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알던 무소유를 직접 마음으로 체험했습니다. 어젯밤 도둑놈 덕에 '버리기'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도둑놈.. 괘씸하긴 하지만 한편 고맙습니다.



오늘 아침.. 신고하러 갔다가 보안카메라를 확인할까말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기껏 조용해진 마음이 괜히 범인을 보는 순간 다시 끓어오르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랍속 한국 지폐들이 없어진 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한국놈이었을까? 이왕 온김에 확인해보기로 했습니다. 새벽 5시 23분, 멀쩡한 젊은 한국놈이 들어왔다가 12분 후 물건을 들고 나갑니다. 제 사무실만 타겟으로 하고 왔다는 뜻입니다. 밴조는 여유있게 케이스에 넣어서 들고갑니다. 놈의 모습을 눈으로 보자 욱하는 감정이 잠깐 치솟았었지만 그 순간 바로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진짜 비웠던 겁니다. 참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낯선 놈에게 끌려가는 제 기타와 밴조와 하드디스크가 안쓰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멀쩡한 육신으로 이런 짓을 해야하는 놈의 처지도 참 안타깝습니다. 

부디 성실하게 땀 흘려 사는 길을 찾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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