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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식물이 말라죽는 터

창으로 바라보이는 건넛길 샤핑몰의 한쪽 라인에 입주했던 가게들이 벌써 몇집째 망해나가는지 모르겠다. 어느곳 하나 3개월을 넘기는 집이 없다. 돈 들여 인테리어 공사를 한참 진행하다 오픈도 해보지 못하고 없어진 경우까지 있었다. 아무리 경기가 안좋다고는 하지만 여긴 경우가 좀 심하다. 6가와 하바드 블러버드의 코너라면 LA 한인타운의 요지에 속하는 곳중의 하나인데, 벌써 일년넘게 네 가게터의 주인이 쉴새없이 바뀌더니 지금은 네군데 모두 덩그라니 비어있다.


엊그제 요란한 지진이 LA에 있었다. 30초가 넘는 시간동안 건물 전체를 뒤흔들던, 내가 겪어본 가장 심했던 강진. 그 지진이 끝난후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창가에 섰었는데, 그때 뭔가를 봤다.


늘 무심하게 바라보던 창밖 정경이다. 하지만 지진이 막 지나간 그 시각엔 새삼스레 살아있는 세상을 감사하게 여기며 세심하게 바라보던 중이었는데.. 잔디의 한부분이 노랗게 떼죽음을 당해있는 모습. 근데 그게 바로 가게들이 줄줄이 망해나간 몰의 바로 옆쪽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가 저렇게 노랗게 변해있었을까? 한번도 유심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겠다. 늘 그 옆을 걸어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역시 깜짝 놀라기만 할 뿐이다. 똑같은 스프링클러가 장치되어 있고 똑같이 시에서 관리를 받는 곳인데 왜 저렇게 한부분만 말라 죽어있을까? 잔디가 파릇파릇 싱싱하게 살아있는 윗부분과 말라죽은 곳의 경계선이 바로 두 건물간의 경계선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신호기가 옆에 있다. 아마 땅속으로 뭔가를 매장하는 바람에 저렇게 된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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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주식투자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장이 좋으면 하룻밤 사이에 르망 한대가 생긴다던 시절이다. 그래서 게나 고동이나 돈을 마련해서 주식을 샀었더랬다. 농사 때려치우고 논까지 팔아 그 돈을 주식에 쏟아붓던 사람들이 실제로 많았던 그때,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돌파했다가 다시 떨어졌다가 하던 그 때. L 부장도 그때 당신 아버님의 퇴직금을 몽땅 주식에 쏟아넣었었다. 장이 좋을때 그는 가끔 우리에게 이랬었다. '어제 르망 한대 벌었데이.. 따라온나 술한잔 사주꾸마'

그러나 미친 주식시장이 계속 그렇게 미쳐서 올라가기만 할 터인가.. 당연히 폭락을 맞았다. 공교롭게도 때는 바야흐로 추석, L 부장도 추석을 맞아 고향 밀양으로 내려갔었는데, 그때 아버님의 퇴직금 투자문제로 형제들 간에 언쟁이 심하게 있었던 모양이다. 동생들과 일언 상의도 없이 아버지의 퇴직금을 몽땅 주식에 투자해 상당한 손실을 입힌 그집 장남 L부장이 동생들의 협공으로 곤경에 처했었겠다.

버르장머리 없이 감히 장남에게 따지고 드는 동생들이 괘씸하셨을까, L부장 느닷없이 서울로 올라 가겠다고 새벽 한시경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고 한다. 가더라도 주무시고 낼 아침에 올라가세요. 놔라 지금 올라갈란다.. 이러면서 몸짓들이 좀 있었겠다. 그러나 다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그 시각, 옷깃을 잡고 뿌리치던 간단한 몸짓들이었지만 취기에 균형을 잃은 L부장은 마루의 큰 유리문쪽으로 몸이 밀쳐져서 유리문은 쨍하고 깨졌고, L부장은 그 깨진 유리들을 가슴쪽에 댄채 마당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심장을 깊숙히 찔린 L 부장은 그렇게 추석날 새벽 고향집에서 거짓말처럼 황당하게 세상을 떴다.

추석연휴중 소식을 들은 우리들, 밀양으로 급히 내려가 충격과 허망함으로 그를 떠나 보냈다. 산 목숨들이 다시 사무실로 출근하던 첫 날, 가장 일찍 사무실에 출근했던 난 뭔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L 부장 책상옆에 놓여있던 커다란 화초였다. 소름이 등 전체로 쫙 돋는 무시무시한 느낌.

L부장쪽으로 향해있던 모든 줄기와 잎이 아주 샛노랗게 말라 죽어있었다. 다른 가지와 잎은 말짱한데 L부장쪽의 가지와 잎들만 처참하게 타 죽어 있었다.

풀과 나무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엄마의 피를 물려받은 난 사무실의 화초관리에 상당히 정성을 쏟았었다. 식물원에서나 살지 사무실에 갖다 놓으면 곧 죽을거라던 것들도 난 꽤 오랫동안 살려두곤 했었다. L부장 옆에 있던 그 화초는 참 멋졌다. 화분이 충분히 크고 가지와 잎도 충실했었기 때문에 며칠 신경을 안쓴다고 말라죽는 그런 가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비실한 화초들도 다 말짱한데, 또 그 화초의 다른쪽 부분들도 다 말짱한데, 유독 L부장을 향하던 한쪽 줄기와 잎들만 며칠사이 샛노랗게 말라 죽어 있었던 것이다. 

같은 건물에 있던 '넙치'에게 급히 연락했다. L부장과 친하게 지내던 넙치가 이 광경을 꼭 봐둬야 했다. 누군가 증인이 없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이상한 현상. 부리나케 내려온 넙치.. 이놈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한다. '이게 뭐지..이게 뭐지..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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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그렇다면 도대체 이거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