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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아프칸 인질을 위한 성금?

내가 어린시절 꿈꾸던 대학생활중 하나는 ‘그룹사운드’였고 또 하나는 ‘농활’이었다. 전혀 배합되지 않는 이 두가지 꿈을 같이 꾸고 있었다. 내 또래 음악을 좋아하던 이들, 산울림과 샌드페블즈, 런웨이, 블랙테트라에 열광하던 우리였으니 그룹사운드는 그렇다고 치고.. 내가 농활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어린나이부터 우리나라 농촌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전혀 아니다. 어느 옛 단편소설에서 농촌 봉사활동을 하던 젊은 대학생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그 이미지의 잔상이 남아서 그러했었다. 또 어느 바닷가에서 대학생 형들로부터 들은 ‘농알’ 가서 고생했고 보람있었다던 이야기가 가슴 깊이 박혔었기 때문이다. 아 띠바 나도 저거 함 해봐야겠다.. 내가 가졌던 농활에 대한 이미지와 관심은 순진했다.

대학에 들어갔다. 농활이 ‘농촌 봉사활동’의 준말인줄 알았었는데 웬걸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준말이란다. 그들은 멋대로 농활의 개념마저도 바꿔버렸다.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순수한 농활이 이미 아니었다. 그 이미지가 퇴색되는 순간 나는 농활에 관심을 잃었다. 소위 ‘운동권’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던 '정의롭고 용감한 모습'이 아니라 편협하고 근시안적 사고와 소영웅심리에 도취된 철부지들의 골빈 전투조직임을 발견했던 내게, 그들의 이념확산의 도구로 변질되어 버린 농활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던 내가 직접 농활을 떠나고자 알아본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이미지 전략이었다. 날라리로 낙인찍힘으로써 잃어버릴 대학생의 이미지를 일정부분 상쇄하기 위한 땜방이었던 거다. 소위 ‘의식있는’ 대학생입네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농활을 한번정도는 다녀와야 그 시대 대학생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82년 늦봄, 농활을 생각했다. 다른 건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근력봉사’만을 위주로 한 농활. 물론 거기에 청춘남녀간의 풋풋한 사랑과 선후배간의 찐한 우정 같은 게 약간 첨가된 그런 농활. 농촌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우리자신을 찾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먹을 것에 대한 감사함과 일하는 기쁨과 보람을 알게 해줄 귀중한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농촌의 입장에서도 일손이 바쁜 때에 젊은 대학생들의 근력봉사는 그들에게도 반가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농촌과 연결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농활을 간다는 다른 서클에 물어보니 자기네들은 벌써 여러해동안 해오고 있기때문에 때가 되면 그 지역 관청이나 마을과 직접 연락을 취해서 시기와 장소와 내용을 결정한다고 한다. 학도호국단에 문의하니 서클단위의 농활을 알선할 수는 없고 자기네가 주도하는 농활에 대원으로 참가하란다. 그건 싫었다. 그래서 먼 친척분이 농사 짓고 계시는 한 시골에 의사타진을 해 보았다.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성의는 고마운데 딴데 알아봐라’ ‘그럼 다른 동네라도 좀 알아봐줘요’
‘다 마찬가지야. 요즘 누가 농활을 좋아하냐? 그 성가시고 귀찮은 걸. 어쩌다 이장이나 청년회장이 거절못해 농활애들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힘이 더 들어’

그랬다. 그들에게 농활은 대학생들의 ‘난입’이었다. 전혀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을 가졌으면서도 ‘아닌척’ 하는 젊은이들이 마을에 떼거리로 몰려 들어와 봉사활동을 빙자해서 이념교육을 한답시고 헤집고 다니는 것은 분명히 난입이었다. 소외 받는 농민과 젊은 대학생이 연대하여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이야기 나누고, 대학생의 입장에서 우리의 농업 현실을 보고 듣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정립하며 실제로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농활이지만, 농민들 스스로에게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행사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농활이 필요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러한 접근으로는 농민들과의 연대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디 멀리 더 깊은 산골이나 알아봐라. 그럼 혹시 니들 필요하다고 하는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여름이면 징그럽다. 농활오겠다는 애들 때문에.. 괜히 우리 애들 마음만 상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대학생들이 그렇게 침을 튀기며 농활의 성과를 이야기 하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작업 시간은 농사일을 하면서 농민 형, 누님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농촌의 현실과 어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책에서 배웠던 것처럼, 믿어왔던 것처럼 세상은 땀 흘린 자에게 그만큼의 대가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왜 그럴까 고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을 하고 같이 노동요도 부르면서 생활 속에서 하게 된다. 보통 점심식사를 제외하고 오전 오후 두 번 참을 먹는데 참은 집마다 각기 다르다. 내가 들어간 마을은 오이 농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시원한 오이 국물에 냉면을 말아먹어 본 기억을 아직도 지울 수 가 없다. 그리고 참과 함께 쉬면서 마시는 동동주 한 사발은 정말 꿀맛이다. 농활에 가면 서울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각종 재료의 술이 나오고, 일단 아침부터 잘 때가지 끼니마다 술이 들어간다. 하지만 술에 취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지 잘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그 힘든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가 즐기면서 마시는 술과는 달리 너무 힘들어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마시는 술. 이것이 농활에서의 술이 특별한 의미라고나 할까? 매일 벌어지는 뒤풀이때 우리가 즐겨 마시던 술 대신, 다른 이름의 소주를 먹을 때 농활대 전원은 거의 죽어 버리기 마련. 하지만 이것도 농활 초반의 현상일 뿐, 농활 기간 내내 먹는 댓병으로 먹는 소주는, 몸속 수분의 절반을 구성할 정도로 친숙해진다. 이렇듯 농활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기간이다. 하지만 30분 자고도 하루 일과를 거뜬히 수행한다.’


그렇다. 대학생들에게 농활은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철없는 대학생들의 계급장이며 전과이고, 엠티이며 수련회이며 색다른 경험맛보기였을 뿐이었다. 다만 경력에 ‘농활대’ 라는 숭고한 활동을 올리기 위한 생색내기였을 뿐이었다. 도움 받을 사람은 싫다는데 어거지로 와선 생색을 내고 돌아가선 봉사활동을 했네.. 하는 것이었다. 이걸 속말로는 ‘딸딸이’라고 얘기한다.

요즈음은 아예 정도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긴 행군을 이루며 꽹과리와 북을 치며 농활대가 들어간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과연 농활을 가는 것인가?

(깃발까지 들고 행군을 한다. 밀짚모자만 쓰면 그게 농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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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변호사 사무실에서 몇 년 일하던 때, 하루에도 서너건씩 종교이민서류를 작성한다. 교회의 프로필을 번역하는데 희안한게 있었다. 모든 교회마다 해외 선교활동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인이래봐야 전체 백여명 남짓한 소형교회에서도 해외 선교를 하고 있었다. 선교사 파송비용이 전체 예산의 10%가까이 육박하는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미국 다음으로 선교를 많이 하는 나라라고 한다. 나는 선교라는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 봉사의 탈을 쓰고 펼치는 전도행위이기 때문이다. 의료선교.. 그냥 의료’봉사’를 하면 되지 웬 선교인가? 의료행위를 미끼로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봉사를 빙자한 선교를 싫어한다. 근데 우리나라가 미국다음으로 선교를 많이 하는 나라라고? 외화가 아깝다.

이상하게도 한국개신교는 선교에 무분별하게 경쟁하고 있다. 왜 이럴까? 
목사의 입장에서는 유형의 실적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배낭여행을 가는 골빈 여행족’이 아니라 좋은 일을 내걸고 해외여행을 하는 ‘착한 봉사족’이 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실적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단에서 이렇게 경쟁적으로 철부지 젊은 애들을 구체적 계획이나 안전장치도 없이 위험지역에 보내는 것이 이렇게 목사와 신도의 이해가 둘 다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해외 선교실적 만들기와 젊은이들의 해외경험 욕구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다.

단기선교가 뭔지 알아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표다.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단기선교 추천지역을 등급별로 구분해 놓았다. 보다시피 아프가니스탄이 보통국가로 되어 있다.

(스위스 스웨덴 프랑스 오스트리아같은 나라로의 단기선교가 과연 선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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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동안 젊은 애들이 몰려가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수선피우는 것, 이와 아주 비슷한 게 있다. 그렇다. 원하지도 않는데 기를 쓰고 와선 생색내기로 일관하다가 오히려 마을 청년들과 괴리감만 확인하는 농활과 모습이 같다. 나는 싫다는데 억지로 와서 도와주겠다며 생색만 내고 돌아가는 이상한 젊은이들.

비록 생색내기였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농활은 파괴행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슬람 지역에서의 기독교선교는 파괴행위이다. 그들의 문화와 공동체를 궤멸시키는 악질 파괴행위이다. 게다가 이랜드 사태, 한기총의 사학법 재개정, 교회의 세습, 회계의 불투명성.. 이런 부끄러운 자화상을 가진 한국의 개신교가 해외 선교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더 해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띠바. 결론만 간단히 말한다. '대학생들의 단기선교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자기도취 수련회일뿐이다.'


이들이 기어이 또 일을 저질렀다. 

(불쌍하긴 하지만.. 참 지지리도 말 안듣는 것들이다)

가지 말라는 걸 무시하고 나가더니 기어이 인질로 잡혔다. 우리나라 군대가 파병되어 있는 위험지역에 인질이 생기면 그것이 얼마나 국가에 해를 끼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무모하게 그곳에 갔다가 결국 인질로 잡혔다. 그것도 단체로 말이다.

이들로 인해 우리나라 정부의 공신력과 외교력이 얼마나 많은 타격과 제약을 받게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똥치우기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야 할까.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 문제로 의견이 갈라져서 대립을 보일까.

‘저거떨 죽는거 알고 들어간 거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 둬. 본떄를 보여야 담부터 말을 들어 쳐먹지. 이번에 풀어주면 두고두고 한국사람들 표적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욕먹어서 안돼. 게다가 저거떨은 또 들어갈거고.. 불쌍하지만 그냥 나둬야 돼. 국민 세금써서 풀어주기만 해봐라..’

(가지 말라는 곳에 간다고 자랑스런 기록사진까지 남겨두었다)

하지만 분별력 없는 철부지 애들만의 잘못이 아닌데다가 (그 교회의 목사놈과 자식들의 이런 무모한 여행을 허락한 부모들이 잘못이며 한국 개신교 전체의 잘못이다) 그들의 젊은 생명이 달린 문제이니 그냥 내비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많은 국민들은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냥 무관심으로 일관해서 죽게 놔두는게 맞지만 그러자니..참. 이래도 부담이 되고 저래도 부담이 되는 아주 더러운 상황이다.


마침 저놈들이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니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애들을 구해낼 생각이면 방법이 있다. 돈을 주고 아이들을 꺼내오면 된다. 단 그 돈은 국가가 지불해서는 안된다. 국제사회의 전례가 될 것이므로 당연히 그럴 수도 없겠지만, 한 교회의 젊은 애들 '수련회' 사고에 대해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세금으로 처리해선 안된다는 국민들의 정서적 거부감도 중요한 이유이다.

국가에 세금한푼 내지 않는 교회들과 모든 개신교인들이 일어나 거액의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젊은이들을 구해내라. 니들이 싼 똥, 니들이 치우란 말이다. 불꽃처럼 일어나 교회에서 '헌금'을 해라. 분명히 말한다. 헌금이다. 모금이 아니다. 괜히 거리로 나와서 씁쓰름한 국민들, 내기도 뭐하고 안내기도 뭐한 국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성금모금'일랑 제발 하지 말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