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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조삼륜 3 - 판사

5. 구속된 직원의 재판 날이 왔다. 이미 현실을 인정하고 구치소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그도 재판 당일에는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아무리 집행유예가 확실하다고 해도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티비나 영화에서 보던 그런 활기차고 생동력있는 재판을 곧 나도 직접 목격하게 되겠다. 검사와 변호사간의 열띤 법리공방, 증인의 증언, 피고인의 진술..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실제 재판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검사는 '존경하는 판사님'으로 시작해서 귀찮은 듯 뭔가를 읽어 내려가더니 ‘징역 3년을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끝을 맺었다. 너무 간단했다. 

이번엔 변호사 차례 ‘피고인은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지요? 네, 만약 상대방이 피해를 입는다고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네.. 다른 사항은 이미 제출한 의견서로 대신하겠습니다.’ 뭔가 영화에서 본것처럼 멋진 활약을 기대했던 변호사의 역할은 이게 다였다.

드디어 이번엔 판사차례, 판사는 재판이 진행중인 동안 검사나 변호사에게 단 한마디 질문도 없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서류만 뒤척이고 있었다. 곧 판사님께서 재판이 뭔가 보여주겠지. 그러나 그는 미리 준비한 듯한 서류를 죽 읽어내리곤 곧바로 선고에 들어갔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방청석의 우리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피고석의 직원과 눈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집행유예가 선고되어서 다행이지만.. 무슨 재판이 이럴까? 재판정을 나오면서 서로 물어봤다. ‘재판이란 게 원래 다 이렇게 하는 겁니까? 거 생각하고 완전히 틀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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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재판정에서 진실규명을 위한 치열한 공방은 단지 드라마에 나오는 가상장면일 뿐이었다. 지리한 서류읽기가 계속되다가 그저 망치만 두들겨지는 재판이 진짜 현실이었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조서재판’이다. 즉, 검사와 변호사가 미리 제출한 서류만 가지고 판사가 재판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판사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검사가 작성한 수사기록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국 검사는 기고 만장해 질 수밖에 없고, 판사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귀찮은 일이 줄어드니 그냥 모른체 한다. 피고인의 인권이나 법적권리는 안중에 없다.

검사들은 가끔 어떤 피의자에 대해 ‘구속수사할 방침’이라고 언론에 이야기 한다. 직분을 망각해도 한참 망각한 발언이다. 구속수사의 결정은 판사가 하는 것인데도 검사들은 구속수사하겠음을 자기가 천명하곤 한다. 이들이 이럴수 있는 것은 신청한 대부분의 구속영장이 그냥 발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속영장신청의 적부도 자세히 심사하지 않는 판사는 재판정에서 유무죄를 가리는데까지도 검찰의 서류에 의존한다.

모든 법조인들은 사법연수원에서부터 이러한 조서재판에 길들여져 나온다. 말로 논리정연하게 공방 잘하는 사람이 아닌, 책상머리에서 논리적으로 글 잘쓰는 사람들만 양산된다는 뜻이다. 공판, 즉 재판정에서 진실규명을 위한 검사 변호사간의 치열한 공방이나, 그에 대한 판사의 날카로운 지적과 능숙한 재판진행은 애당초 우리나라 법조인들에게선 기대할 수가 없다. 배운 적도 없고, 해 본적도 없고,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서류위주로 진행되는 조서재판은 재판자체의 투명성이 공개되지 않는다. 이것은 곧바로 법조비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조사과정, 재판과정, 선고과정이 투명하지 않으니 비리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검찰의 조서에 도대체 어떤 내용이 있는지,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성한 사람과 읽는 판사만이 안다. 고향선배이니까, 검사출신이니까, 법관출신이니까.. 뇌물과 인간 정리가 작용할 충분한 공간이 있다. 그래서 법조인들이 다들 부유하게 산다.



기소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검찰의 조사와 공소가 유무죄 판단과 형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니 검찰의 위상은 비상식적으로 높아져서 그들은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양 행세하게 되었고, 국민들에게 법원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검찰의 존재만 부각된다.

판사님들.. 신청되는 영장청구에 크게 하자 없어보이면 그냥 결재하고, 검찰 공소에 크게 하자없어 보이면 그냥 망치 두드리고. 법정에서 심문하느라 진을 빼지 않아도 되고, 결정권을 더 가진 배심원단이 있길 하나.. 때때로 상납되는 단물만 먹으면 되니 판사생활 즐거워라.. 역시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판사되길 잘했지. 공부 못하던 검사애들처럼 수사하느라 고생을 하나, 공부 아주 못하던 변호사애들처럼 수임하느라 영업을 하길 하나.. 조서재판은 판사들에게도 아주 편안한 방법이었다.


공판중심주의는 사건의 실체에 대한 모든 심증을 공판절차를 통해 형성해야 한다는 형사재판의 원칙이다. 물론 우리 형사소송법에서도 이 원칙을 확립하고는 있다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그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검찰은 피의자와 참고인을 수사한 기록과 확보한 증거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하고 재판부는 그 기록과 증거에만 의존해 재판을 한다. 물론 큰 사건의 경우에는 법정 공방이나 심문도 있지만 작은 사건의 경우에는 대개 법관의 사무실에서 유무죄가 미리 결정되는 일이 많다.

공판중심주의의 기본 원칙은 공개 재판이다. 판결은 법률에 별다른 규정이 없으면 구두변론에 의거해야 한다(형사소송법 37조 1항). 공판 외에서 작성된 조서가 법관의 심증을 형성하는 자료가 돼서는 안 된다. 직접 조사한 증거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을 제출하고 그밖의 서류나 증거물은 첨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법원의 예단을 방지하는 공소장 一本主義도 중요한 원칙이다.



대부분 우리가 생각해 본적도 궁금해 본적도 없는 내용들이다. 조서재판..공판.. 듣고 보니 그럴듯하기도 하고, 검찰이 왜 그렇게 눈과 어깨에 힘을 주는 이유도 알겠고, 판사라는 사람들이 좀 작아보이고 무능해 보이기도 하고..그런다.

국민들이나 법조인들이나 흘러온 대로 그냥 저냥 그러려니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대법원장의 일갈이 있었다. 귀가 번쩍 뜨인다.


→ 법조삼륜 1 – 검사
→ 법조삼륜 2 – 변호사
→ 법조삼륜 3 – 판사
→ 법조삼륜 4 – 사법고시, 모자라는 2%
→ 법조삼륜 5 – 사법연수원, 연고주의의 온상
→ 법조삼륜 6 – 삼륜의 한심한 힘겨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