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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LA '한국비디오가게'의 운명

한국 비디오가게 - 땅집고 헤엄치기
십 여년 전까지만 해도 LA로 갓 이민 온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사업체는 단연 ‘한국 비디오 가게’였었다.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의 TV프로그램을 그리워하는 고객이 무궁무진 했었다. 또 상대하는 고객이 100% 한국사람이니 영어 한마디 못해도 되었고, 방송사들과의 암묵적 약속으로 일정거리 내엔 다른 비디오 가게가 생길 수 없어 경쟁이 전혀 없었다. 한국비디오가게 운영은 땅집고 헤엄치기보다 더 쉬웠다. 그래서 LA근교 소도시의 코딱지 만한 비디오 가게도 오십만불 넘게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한국비디오가게의 성업, 참 이상한 거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도 LA엔 한인 방송국이 있었고, 그 방송을 통해 한국의 인기있는 프로그램들은 거의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서울 한 복판에 한국 TV 비디오가게가 있어서 어제 TV 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해서 대여하는데 이게 성업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이었다. 이상하다? TV로 보면 되지 왜 돈내고 비디오를 빌려 보나?


이상스런 '거꾸로' 홀드백 (hold back)
한인방송국들이 현지에서 내보내는 프로그램들이 한국TV 방송 이후 6주 내지 8주가 지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가 이미 바뀌었는데 추석특집을 보는 때도 있었고, 쌀쌀한 늦가을에 납량특집극을 보기도 했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한참 철지난 프로그램에 식상한 교민들이 어쩔 수 없이 돈을 내고 비디오를 빌려보는 거였다. 인터넷으로 이미 소식을 다 아니 말이다.

원본 테잎을 선박으로 이송하나? 왜 6주나 걸리는 것일까? 이유는 ‘한국 비디오 가게’의 영업을 위한 홀드백(hold back)때문이었다. 한국과 시차 없이 한인방송국에서 프로그램들이 방송이 되면 한국 비디오 가게가 될 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선 이거 굉장히 불편했다. 방송국이 뻔히 있는데 따로 돈을 내고 비디오로 먼저 빌려봐야 하는 이 이상스런 구조.. 이건 방송국과 비디오업주들의 명백한 횡포였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판권을 가진 놈이 그렇게 하겠다는데야.. 워낙 오래도록 이래왔었기 때문에 이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미주지역 한국 TV프로그램 홀드백은 원래 의미의 홀드백과는 많이 다르다.

원래 의미의 홀드백이란.. 영화사에서 영화 종영이후 어느정도 기간이 지나서 비디오를 출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을 끄는 이유는 ‘극장사업주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비디오가 너무 금세 출시되면 극장을 찾으려던 관객들의 상당수가 ‘번거롭게 극장에 가서 비싼 돈 내고 보느니 차라리 집에서 편하게 싸게 비디오로 볼란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이 TV 공중파에 도입되어 ‘본 방송’ 이후 다른 케이블 방송이나 다른 방송 플랫폼에서 재방송되기까지 역시 일정기간이 지체된다. 공중파 TV의 수익성 보호차원이다.

근데 미국 한인 TV 방송국과 비디오가게들은 이걸 거꾸로 하고 있었던 거다. 우선권이 비디오가게에 있고, 그들의 수익성 보호차원에서 홀드백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 TV 방송이 나가는 괴상한 구조인 것이다. 재정이 워낙 열악했던 미주지역 한인 방송국들 입장에선 수익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비디오가게에 우선권을 주고 자기들은 나중에 방송하는 ‘쪽팔리는’ 구조를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디렉티비에서 Korean Package를 선택하면 한국 방송 채널이 무려 열개나 된다. 뉴스는 완전한 리얼타임 방송이다. 미주지역에서도 방송국간 무한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방송국간의 담합은 이제 먼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광고시장도 커졌다. LA 지역의 비공식 교민인구는 대략 100만명쯤이다. 한국의 웬만한 지방 도시의 규모인 것이다. 이들이 소비하는 한국 물품과 식품도 상당하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상품 CF가 이곳에서 똑같이 방영되는 이유다. 십여년전만 하더라도 이곳의 TV 광고는 '삼십년전 한국의 동네 극장 광고'였었다. '무슨무슨 라사..' 하던 그런 광고들. 광고단가가 워낙 싸다보니 보기 민망한 동네 가게 광고가 버젓이 TV광고로 나왔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동네 가게광고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광고의 대부분은 한국 상품 CF나 미국 대기업들의 CF가 차지하고 있다. 한인 방송국들의 입장에선 한국 비디오 가게로부터 받는 원본료가 그다지 중요한 수입원이 아니게 된 것이다.

또, 세상은 이미 눈 돌아가게 빠른 인터넷 세상이다. 비디오가게에 가서 돈 내고 비디오를 빌려보는 사람들은 이제 극소수 노인들밖엔 없다. 인터넷에선 전 세계의 모든 콘텐츠들이 실시간으로 돌아가는데 누가 비디오가게에 직접 가서 비디오를 빌려본단 말인가. 


'추억의 사랑방'에서 '악덕 중간상인'으로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인 방송국의 입장도 이제 변한 것 같다. '거꾸로 홀드백'이 굉장히 불편해졌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수익모델이 뻔히 보이는데 ‘한국비디오 가게’에 발목이 잡혀있는 꼴이니 말이다. 어차피 홀드백에 관해서는 명문 계약도 없었단다. 급기야 모 방송국에서 Mvibo라는 웹싸이트를 오픈해서 한국 TV컨텐츠를 실시간으로 서비스하기 시작했단다. 그러자 그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꾸로 홀드백'을 계속 유지해 달라는 그들의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민생활의 향수를 달래주던 고마운 사랑방에게 한인들이 왜 이러는 걸까? 

방송국과 소수 비디오업자들의 수익을 위해 존재했던 '거꾸로 홀드백'이 그동안 교포들을 너무 괴롭혔기 때문이다. 참 미안한 얘기지만.. 미주 동포사회에 '한국비디오가게'의 존재는 이미 '짜증나게 만드는 불필요한 중간상인'일 뿐, 이민생활의 향수를 달래주는 고마운 사랑방이 아닌 것이다.

이제 제자리로 찾아가야 할 시점이다. 한국 TV 콘텐츠가 미주지역으로 실시간으로 넘어오고, 미주지역 방송국은 그 프로그램들을 홀드백 없이 바로 방송하고, 그 이후 약간의 홀드백을 거쳐 인터넷이나 다른 플랫폼(비디오가게 등)을 통해 분배되는 구조로 가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긴 하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