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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얘기

김창완

희한한 노래가 하나 나왔다. 노래인지 고함인지, 가요인지 동요인지.. 강한 사운드로 봐서는 AFKN에서 듣는 외국음악 같은데, 가사를 보면 우리나라 동요다. 당연히 지켜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귀에 익은 멜로디 규칙(우리 귀가 가진 타성)을 무시해 버리는 괴상하고 파격적인 노래다.

신선하다는 표현은 너무 약하고, 충격적이거나 획기적이라는 표현을 써야하는데 이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이 곡들을 묘사하려면 ‘골 때린다’ 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일상 대화의 인토네이션을 멜로디로 쓰고,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하고,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지껄이는 그 재기발랄함, 번뜩이는 위트.


고리타분한 뽕짝류와 단순하고 밋밋한 포크음악만이 들리던 시절에 이들의 음악은 혁명이었다.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들을만한 노래도 없고 좋아할 만한 가수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던 어두운 시절, ‘혜성과 같이’ 산울림이 나타났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78년인가.. 산울림의 첫 공연, 문화체육관을 가득 메우고 열광하는 고삐리들틈엔 나도 있었다. 공연 내내 몸을 흔들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지르고.. 미친듯이 산울림에 빠져들었었다. ‘열광의 도가니’라는 표현을 비교적 내가 잘 아는 이유가 바로 그날 그곳 산울림의 공연현장에 있어봤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주 대단했었거든. 그게 딱 열광의 도가니였지. 

당시 내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산울림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물론 음악에 전혀 관심없었던 넘들은 빼고. 훗날 내 또래의 꽤 많은 가수들이 당시의 산울림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추억을 이야기 하는 걸 자주 들었다. 아주 많은 아이들에게 영감을 심어주었던 게다. 산울림이라는 괴상한 사람들이.

산울림 이전시대에는 과연 한국에 락이란 게 있기나 했었나 싶다. 리듬은 락이되 멜로디는 뽕짝류 혹은 멜로디는 락이되 리듬은 슬로우 고고.. 더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단지 ‘악기의 구성’만 락인 ‘무늬만 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모지에서 김창완은 실험성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음악을 시도했었다. 평론가들은 이들을 한국적 락을 이룩한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산울림의 출현이 한국 락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근데 참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건.. 그 위대한 산울림도 그들의 ‘연주’와 ‘보컬’ 실력으로만 본다면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연주력은 C혹은 D, 특히 김창완의 가창력은 만장일치 F다. 즉, 가수의 ‘기본’이 전혀 안되어있다. 그럼에도 산울림이 한국 락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김창완의 천재적인 창의성 A+ 때문일 것이다. 천재적인 창의성.. 그의 창의력은 다른 범부들이 결코 흉내내거나 따라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김창완의 천재성은 다른 곳에도 또 있다. 그의 변화무쌍한 변절, 다양성에서도 보인다.
열정정인 락커인듯 하면, 어느샌가 서정적인 포크가수이고
서정적 포크가수인 듯 하면, 어느샌가 장난꾸러기 동요가수이고
장난꾸러기 동요가수인 듯 하면, 열정적인 락커다.
도대체가 종 잡을 수 없는 이 변화무쌍한 변절은 바로 김창완의 천재성에서 기인한다.

산울림이 활동한 기간만을 따지면 2년 6개월 동안이라고 한다. 설마.. 앨범을 열 몇장을 냈는데 활동기간이 2년 6개월이라니. 그러나 사실이다. 잠깐 활동하다 쉬고, 쉬다가 다시 잠깐 모여서 앨범 내고.. 그랬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많은 연령층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들이 ‘오래도록’ 뭉쳤다 흩어졌다를 한 까닭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이 부른 노래들이 여러 장르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여러가지 장르의 곡들을 만들고 불렀다.


그의 천재성을 하나 더 언급하자면.. ‘다작이지만 졸작이 없다’는 점이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등학교 때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김창완의 음악을 수필처럼 진행하는 코너가 있었다. 매일 매일 테마에 맞춰 그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곡이 서너곡씩 나왔었는데, 어느 곡 하나도 시간에 쫓겨 엉터리로 대충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곡 한곡이 다 아름다웠다. 하루에 짧은 수필 서너편을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일진대, 하루에 서너곡씩 노랫말과 곡을 지어낸다는 것은 (만약 그 노래들이 전부 김창완이 직접 지어 부른 것이었다면) 그가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니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겠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듣고 발표는 되지 않았던 곡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곡이 하나 있다. ‘흰 종이에 죽음이란 글자를 써 보았네..’ 하던 노래. 발표 해봐야 100% 금지곡으로 묶였을 가사. 그는 자유롭게 기타를 가지고 시를 썼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도 내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김창완은 통기타가수 김창완이다.



김민기와 김창완..
내가 예전에 부르던 노래의 80%는 김민기 아니면 김창완이다.

[기타를 연필삼아, 노래로 시를 짓는 천재]임에는 둘이 같지만
둘은 많이 다르다.

김민기가 베토벤이라면
김창완은 모짜르트이다.

김민기는 가을 날 숲속길에 있고
김창완은 봄 날 학교 운동장에 있다.

김민기는 바닷가를 서성이는데
김창완은 마을을 노닌다.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면 사람이 참 착해지고
김창완의 노래를 들으면 세상이 살기 재밌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김민기와 술을 마시면 내가 말이 많아질 거 같은데
김창완과 술을 마시면 김창완이 말이 많아질 거 같다.

김민기와는 죽기 전, 쑈를 해서라도 꼭 한번 술잔을 기울여보고 싶지만
김창완과는 그러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다.^^

그래도 김창완의 동서에게 자리좀 마련해 달라고 부탁은 해놓았지만, 동서지간이 과히 친해보이지 않아서 그런 자리가 성사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김창완의 통기타 음악은 참 좋다.
나란히 ‘살아 있음에도’ 트리뷰트 앨범을 선사 받은 이 행복한 두명의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