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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얘기

근덕 13호 2 - 76년~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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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클릭하면.. 바다가 확 펼쳐진다. 여기서 항상 바다를 보곤 했었다. 두 여학생이 바로 Y양과 S양이다. 반반한 얼굴로 양아치들을 끌어들인..)

1. 내가 처음으로 근덕이라는 바닷가를 만났던 때는 1976년이다. 주변에 해수욕장이란 게 아예 없었던 때, 그래서 사람자체가 아예 없었던 파라다이스 바닷가였다.

밤이 되면 완전히 별세계가 펼쳐진다. 하늘에 별이 하도 많아 쏟아질 것 같다. 서울에서 컴컴한 밤하늘에만 익숙해 있다가 근덕바다에서의 밤하늘은 너무 밝다. 별들이 너무 많다. 책에서만 보던 별자리가 훤히 눈에 들어왔다. 전갈자리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하늘 여기서 저기까지 희뿌옇게 뿌려져 있는 것.. 어떤 놈은 우유를 흘린것 같다고 했었고, 어떤 놈은 좃물 흘린것 같다고 했었다. 사실 후자에 더 가까웠었다.

그게 바로 은하수라고 했다.
난생 처음본 은하수가 하늘에 가득했다.

얼마전 세도나를 다녀오다가 아무런 불빛도 없는 막막한 도로 가운데에서 차를 세웠었다. 은하수를 혹시 볼까 하고. 그러나 은하수는 볼 수 없었다. 근덕 이후 다시는 은하수를 본 적이 없다.


해안선 왼쪽 끝 산꼭대기에서 강한 불빛이 근덕바다를 가끔 비춘다. 저게 뭐예요? 묵호항의 등대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등대불빛은 아니었다. 군인들의 서치라이트 제논 불빛이었다. 근데 다행인게..난 아직도 그걸 등대불빛으로 기억한다.

너무 조용하고 고리타분 건전했던 바닷가, 명색이 교수 휴양촌이라서 그랬나.. 가족단위의 세련되고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들 뿐.. 한결 젊었던 아버지 엄마 누나들 삼촌들 이모들, 그리고 자글자글 이종고종 사촌동생들. 참 건전한 근덕바다였다.

대가리가 커지면서 차츰 가족들과의 여행보다는 친구들과의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소중했던 시간들은 바로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휴가. 그때가 그립다.


어느날 저녁,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말하길, 중학생이상 학생들은 오늘 밤에 전부 가운데 마당으로 모이란다. 캠프파이어가 있을 거란다. 국민학교때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야영을 하면 캠프파이어가 있었다. 푸른들 푸른하늘 텍사스, 야뽀이 타이타이 예야, 이런 노래를 불렀다. 중학교때 보이스카웃 야영을 해도 캠프파이어가 있었다. 순 까까머리 남자쉐이들이었다. 조별로 대항전에서 지면 캠프파이어 끝나고 집합도 있었다.

바닷가에서의 캠프파이어 이거 괜찮다. 바닷가에 엄청난 모닥불.. 여기저기 여학생들도 꽤 섞여있다. 대학생 형들을 따라 노래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도 시선이 가끔 다른데로도 간다.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남자따로 여자따로 갈라놓는, 반 인륜적이고 반 본능적이고 반 문화적인 원시적인 교육제도하에서 익숙해진 탓일까.. 여학생들이 놀이문화에 같이 끼어있다는 게 영 어색하면서도 기막힌 무엇인가가 있다.

대학생 오빠들이 아주 귀여워하던, 이미 그 휴양촌 안에서 인사성 밝고 붙임성 있기로 유명했던 여학생을 그때 처음 봤다. 별명도 이상한 ‘아다’ 근덕 교수휴양촌의 여왕이다. 이 아다와의 추억은 참 많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얘기한다.



2. 1977년, 처음으로 친구들끼리만 근덕을 갔다. 이수천 고승환 정헌.. 머리가 굵어지자 어느덧 가족들보다는 친구들이랑 가는 쪽으로 계획이 잡혀진다. 부모님들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어머니들께서 바리바리 반찬들을 싸주셨다. 전기가 없던 그곳에 음식의 보관은 참 중요했었다. 그렇게 일러주셨건만 노는데 정신 팔린 우리는 그게 하나도 안 중요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정성껏 싸주신 반찬들이 다 상해버렸다. 첫날 아껴 먹자며 몇조각씩 밖에 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던 장조림 네근(집집마다 한근씩 해왔었다)을, 그 아까운 장조림 네근을 다 버렸다. 옆집 15호 아다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살려보려고 몇번 끓이고 했었으나 워낙 상해버려 끝내 건지지 못했다. 그때 그거 정말 아까웠었다. 다음날 하루종일 넷이 전부 속상해서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다 잊어먹었다.

카레가 남아있었다. 근데 이걸 직접 만들어 먹어본 넘이 아무도 없다. 겉 포장지는 불쏘시개로 썼는지 없다. 겉 포장지가 없으니 조리법도 없다. 밥을 한 다음 밥위에 그 가루를 뿌렸다. 영 이상하다. 김치 갖다 주러 왔다 그걸 본 아다가 기겁을 하고 박장대소한다. '엄마 얘네들 봐.. 카레를 밥에다 뿌려먹어' 다 버리고 15호에 가서 밥을 먹었다.

뒷산 소나무숲에서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담배 피우는 걸 보여주었다. 부러워 했다.권하지 않았는데 다들 스스로 시도하겠다고 했다. (이거 끝까지 논란이 많았다. 시켜서 억지로 담배를 배웠다. 아니다 스스로 담배를 달라고 해서 준거다. 얼마전 수천이를 이곳에서 왔을 때 아직도 담배를 못 끊고 있길래 끊으라고 했더니 이 얘길 또 끄집어 낸다. 피우라고 꼬신 새끼가 이제와서 딴소리 한다고.)

소나무숲에서 그렇게 솔담배(진짜 솔담배, 나중에 전매청에서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솔담배라는 게 나왔다)를 피웠다. 근덕바다가 조금씩 안 건전해지고 있었다. 당시 강원도의 소주는 경월소주, 그리고 당시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보드카 – 하야비치, 로진스키

경월소주 대병 하나와 하야비치 서너병, 넷이서 저녁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이 밤이 되니 취한다. 객기가 발동한다. 바닷가에 나가 수천이를 모래밭에 파 묻었다. 가슴 위만 놔두고 몸을 파묻어 버렸다. 헌이가 파묻은 수천이를 자꾸 때린다. 말렸다. 모래속에서 파리해진 수천이를 꺼내어 방갈로로 들어왔는데 헌이가 계속 시비다. 물론 장난이다. 부엌칼로 장난을 치는데 조금 아슬아슬해 보인다. 훗날 수천이가 항상 이때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하곤 했다.

‘그때 헌이 새끼 진짜로 날 찌르려고 했다. 내가 피하지 않았으면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대 현장에서 그걸 목격했던 승환이와 나는 그냥 웃는다.


78년, 79년은 막 섞였다.

등뒤에 '당이동' 이라는 이상한 글자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양아치. 17호 대학생 형들 누나들. 아다 언니의 畵家 남자친구. 그리고 '나 어떡해'와 '이빠진 동그라미'

방갈로촌과 바닷가 사이의 야트막한 둔턱.. 그곳에 다들 나란히 앉았다. 아다와 아다 언니가 노래를 부른다.
밤배. 이게 밤배의 시작이다.


아다가 자기친구들이랑 놀러왔다. 이거 웬떡이냐. 하나빼고 다 이쁘다. 편하고 즐겁기만 했던 근덕바다에 전운이 감돈다. 여학생 넷에 남학생 넷. 비록 우리보다 한살 위 누나들이었지만 바닷가에선 상관없다. 우리 멋대로 가위바위보로 짝을 결정해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못생긴 하나가 승환이 짝이 됐다. 그런데 그렇게 정한 짝이 무슨 소용.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바뀐다. 그중 둘은 상당히 괜찮다.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괜찮다. 그 둘중 하나가 서울서 알아주는 날라리였나 보다.

그 애를 일방적으로 따라서 서울서 한무리의 양아치들이 근덕바다로 찾아왔다. 어울려 노는 우릴 보고 눈이 뒤집혀 졌겠지.. 드디어 반대쪽 방갈로 뒷편에 마주 섰다. 한쪽은 평범한 고등학생들, 상대는 학생인지 구분이 안가는 양아치들.. 인원은 아마 4:4였던 것 같은데 우리쪽엔 방해만 될 수천이가 있다. 상당히 꿀리는 느낌이었다. 기 싸움, 다구싸움을 한참 하고 있는데.. 아뿔싸 승환이가 실수를 했다. 이 쉐이가 얼떨결에 존대말을 한 것이다. 아.. 저새끼가.. 수천이는 원래 없는 셈 쳤지만 믿었던 승환이가.. 태권도 잘하는 그 승환이가..

전세는 순식간에 상대방쪽으로 기울고..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 그때였다. 7호쪽에서 왁자지껄 갑자기 열댓명의 남자아이들이 나타났다. 하루전인가 도착한 배명고등학교 아이들. 당시 족보를 캐보니 승환이 친구의 친구들이길래 일단 반갑게 인사하고 말았던 애들이었다. (일행중에 아주 예쁘게 생긴 국민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첨엔 기집앤줄 알았는데 남자애였다. 몇 년 후 우연히 알게된다. 얘가 바로 윤충희 동생 두섭이였다.)

아주 느글대는 목소리로 한넘이 그런다.
‘여기 씨바 무슨 일이야. 야 무슨 일 있냐?’

천군만마가 바로 이런때 쓰는 말.. 전세는 순식간에 우리들쪽으로 기울고, 양아치들은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

‘근데 니들 어떻게 알고 온거냐?’
‘여자애들이 그러더라. 니들 큰일 났다고 빨리 가보라고 해서’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으. 씨바 하마터면 좆될뻔 했네.. 아무튼 이쁜 기집애들은 언제나 얼굴값을 한다니까.. 저뇬 건들지 말아야겠다. 헌이랑 다시 합의를 봤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강간전과가 씌워질뻔했었는데.

80년 고삼시절, 근덕을 건너뛰었다.
드뎌 81년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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